‘등밑 처마 고드름과 참새소리 예쁜 이 마을에 살 거예요. 소격동을 기억하나요. 지금도 그대로 있죠.’
돌아온 서태지는 신곡 ‘소격동’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하지만 서울의 오래된 주택가들이 으레 심란한 변화를 겪어온 것처럼 소격동 역시 옛 마을의 정취를 지켜내기엔 힘이 부친 듯 보인다. 젊은이들 취향의 카페와 옷가게들이 살림집들을 야금야금 밀어내고 있는 데다 올 들어 시작된 도로명 주소 사용으로 동네 이름은 삼청로 북촌로 율곡로 등으로 달라졌다. 그렇다 해도 아직 소격동은 도심에서 일상과 예술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한가롭게 걸으며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골목길 풍경에서 추억을 되새기고, 옛 기무사 터에 들어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중심으로 흩어진 갤러리에서 예술의 향기도 느낄 수 있다.
북촌의 전시장들을 돌아보다 색다른 볼거리와 마주쳤다. 국립민속박물관 맞은편의 한옥에 자리한 학고재 갤러리 앞에 덩치 큰 바위처럼 생긴 쇳덩어리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내렸던 가을비로 생겨난 주홍빛 녹물 자국으로 물든 쇳덩어리가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실내로 들어가니 또 다른 쇳덩어리가 정좌하고 있다. 폐기된 침목이나 철물을 소재로 작업해온 중견 조각가 정현 씨의 신작들이었다.
작품이라곤 하지만 작가가 한 일은 포항의 제철소에서 ‘장기근속’을 마치고 은퇴한 파쇄공을 서울로 가져온 것이 전부다. 파쇄공은 크레인에 매달렸다 낙하하면서 용광로에 넣을 만한 크기로 철 부산물을 깨뜨리는 일을 한다. 오르락내리락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에서 살점은 뭉텅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생채기들이 남게 된다. 그렇게 원래 무게(16t)가 절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던 파쇄공. 작가는 밝은 눈으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에서 아름다움과 존재의 의미를 찾아냈다. 쇳덩이를 예술의 품으로 끌어안은 작가는 “잘 겪은 시련은 언제나 아름답다”고 말한다.
혹독한 시간을 거친 파쇄공이 그랬듯이 흐르는 세월은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머리카락은 성글어지고 그림자는 엷어지고…. 김종길 시인의 ‘가을’은 마치 담백한 수채화 드로잉 같다. 가을과 인생을 대비하는 원로 시인의 수수한 시어들이 쇠락하는 것의 애틋함, 살아 있음 그 자체에 대한 경의를 깨우쳐 준다. 저무는 해가 더 곱다 하지 않던가.
청명한 가을인가 했더니 아침저녁으로 한기가 스며든다. 어느새 해는 짧아졌다. 해마다 이맘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의 가사를 떠올리며 눈부신 햇살도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도 아껴가며 즐기고 싶다. 10월의 마지막 주말, 또 한 번의 가을이 훌쩍 떠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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