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가 술 드시고 오실 때면 늘 통닭을 사오셨거든. 그때 생각도 나고, 다들 고맙기도 해서, 한 마리씩 샀어.”
생뚱맞았다. 그 선배는 늘 그랬다. 엉뚱하고 맥락 없이 행동했는데 왠지 모르게 사람을 뭉클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골칫거리였다. 동기들은 승진해 팀장이 되었는데 그 선배만 만년 대리였다. 결혼도 마흔이 다 되어서야 겨우 했다. 집안의 못난 형 같았다.
그날도 팀원들끼리 조촐하게 회식을 하던 중 갑자기 사라져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가신 거지’ 걱정하며 소주 몇 병을 비웠을 때 덜컥 식당 문이 열리고 선배가 통닭을 내밀었다. 비닐봉지 밖으로 고소한 기름 냄새가 새어 나왔다. 봉지를 든 선배 너머로 그의 아버지 모습이 그려졌다. ‘통닭과 아버지’라는 드라마가.
서양에서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일요일 식사에 닭이 등장하는 게 자연스럽다. 우리가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것처럼 서양 사람들, 특히 영국 사람들은 일요일이면 ‘선데이 로스트(sunday roast)’를 즐긴다. 말 그대로 닭을 오븐에 구운 요리인데 영국인들이 자랑하는 전통 음식이다.
‘포크를 생각하다’란 책을 쓴 영국의 음식 전문작가 비 윌슨은 로스트치킨이 영국에서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자원의 문제라고 말한다.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영국엔 숲이 지천이었고 나무를 아낌없이 베어 화덕에 집어넣고 온갖 고기를 구워 먹었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로스팅은 이웃 프랑스에서도 부러워한 사치스러운 조리 방법이었다고 한다.
가스불이 일반화된 지금에 와서는 대단할 게 없다. 오븐에 넣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만들기 단순할수록 좋은 닭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좋은 닭이 생각보다 구하기 어렵다. 다 자라기 전에 잡기 때문에 요즘 닭은 옛날만큼 크지도 않다. 사료 효율을 따지다 보니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어차피 닭값이야 몸무게만큼 쳐주니 성장기가 끝나자마자 잡는 거다. 우리가 먹는 닭은 대개 사춘기 닭인 셈이다.
문제는 이런 닭은 맛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영계가 더 맛있지 않으냐고?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 영계는 어린 만큼 연하지만 단단한 근육량이 적어 깊은 맛이 없다. 토종닭, 그 큼지막한 것이 맛있다. 남자처럼 닭도 커야 된다.
그런 닭을 구했으면 먼저 두 손으로 버터나 올리브유를 닭에 골고루 발라준다. 소금도 팍팍 뿌린다. 텅 빈 배 속에는 양파나 로즈메리 같은 허브를 넣는다. 감자도 좋고, 빵도 상관없다. 소시지도 환영이다.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면 다 괜찮다. 마지막에 구멍을 틀어막듯이 레몬을 콱! 하고 쑤셔 넣는다.
다음은 구울 차례다. ‘완벽한’ 로스트치킨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야 한다. 그러자면 불질을 잘해야 한다. 먼저 220도 정도 되는 고온에서 15분 정도 구워 껍질을 노릇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160도 정도로 낮춰 속까지 은근히 익힌다. 대략 1시간 남짓 걸린다.
다 굽고 나면 도마 위에 올려 부위별로 해체한다. 지글거리는 기름, 손대면 툭 하고 부서질 듯 바삭거리는 껍질, 버터의 고소한 맛과 입맛 도는 레몬의 신맛, 허브의 치명적인 향기에 매료될 것이다. 가벼운 와인 한잔을 곁들이고 나면 앞으로 ‘선데이’만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회식 자리에 통닭을 사들고 온 그 선배도 지금은 가족과 선데이 치킨을 나누고 있을까? 끝내 권고사직을 당한 그 선배는 첫애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회사를 떠났다. 공부를 다시 하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잘 구워진 닭을 보면 종종 그 선배 생각이 난다. 착하기만 했던 사람,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필자(32)는 영국 고든 램지 요리학교 ‘탕테 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 호텔 등 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