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만에 일본 친정에 다녀왔다. 일본에 돌아가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특히 도쿄는 인간관계가 희박하다. 자기 일만으로도 워낙 벅차서 남들과 부딪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친정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의 일이었다. 젊은 엄마가 오른손에는 유모차와 가방, 왼손에는 17개월 정도 된 남자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최근 일본에서는 대중교통 내에 유모차를 싣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논쟁이 일어난 적도 있다. 그 때문인지 아이 엄마는 유모차를 접었다.
한창 붐비는 시간대여서 그런지 빈자리가 없었다. 한 손으로 아들을 안고, 전철의 흔들림을 견디는 모습이 참 위태로워 보였다. 전에 외국에 살아본 일본인 친구는 “일본에서 애를 키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공공장소에서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핀잔을 듣거나 주눅이 든 적까지 있다고 했다.
아이 엄마 앞에 앉아 있던 노부부는 잠시 젊은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긴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는 없었다. 나 역시 고향으로 가는 짐 가방을 두 손 가득히 들고 있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만 허둥댔다. 내가 유모차만이라도 좀 잡아준다면 아기 엄마가 편할 것 같은데.
옆에 서 있던 직장인 남성도 무표정했다. 어쩌면 내심은 돕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남자는 이런 일이 있을 때 너무 수줍어한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스스럼없이 돕는 걸 어려워한다. 내 상념은 곧바로 한국 남자와 일본 남자에 대한 비교로 이어졌다.
한국인 친구는 내게 “일본 남자와는 결혼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친절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일본 남자들은 친절하지 않은 게 아니라 수줍음이 많을 뿐이다. 상대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있더라도 표현 방법이 서투르다. 특히 한국 남자와는 큰 차이가 있다.
“너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게”처럼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대사를 한국 남자들은 진심을 담아 ‘실제로’ 여자들에게 말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순정만화 쓰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실제로 들어본 경험은 없다. 하지만 만약 듣는다면… 쑥스럽지만 무척 좋을 것 같다. 한국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한 한국 남성은 내게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주었을 뿐 아니라 계단이 위험하다며 무거운 가방까지 함께 들어주었다. 정신이 없어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진 못했지만, 정말 멋있었다!
만난 지 100일, 1년, 2년 기념일을 챙기고 이벤트를 기획하는 한국 남자들은 마치 슈퍼맨 같다.
프러포즈도 일본 남자와 한국 남자는 다르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한국 남자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가게를 빌려 케이크에 반지를 숨겨두거나 상대 여성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이벤트를 ‘실제로’ 한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함께 날고 있다가 착지점으로 갔더니 ‘나와 결혼해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 감동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난 기혼인데도 그 이야기에는 안 부러워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일본 남자도 프러포즈를 할 때는 멋진 식당을 예약한다. 다만 ‘서프라이즈’는 없다. “프러포즈가 물론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드라마틱한 연출도 중요하다”고 말했더니, 한 일본 남자는 “한국인들은 프러포즈까지 창의적으로 해야 한다니 굉장하다”며 혀를 내두른다. ‘해보고 싶긴 하지만 도저히 부끄러워서 못하겠다’는 수줍은 일본 남성이 많을 것이다.
옛날 맥주 광고 문구에 ‘남자는 묵직하게, 삿포로 맥주’라는 게 있었다. 지금도 남자는 과묵한 것이 미덕이라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부부 간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을까. 부부니까 이심전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남자뿐이다. 여성은 나이를 먹어도 다정한 말, 아니 ‘서프라이즈’가 좋다. 여성뿐만 아니라 인간은 다 그런 것이 아닐까. 말을 한마디 걸어 주어도 기분이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
일본 전철 안의 아기 엄마에게 “힘드시겠어요”라는 말이라도 건넸다면, 양팔에 걸렸던 그녀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을지도 모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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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니시 히로미 씨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있는 일본 주부다. 한국에서 산 지도 3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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