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내년도 무상급식 예산 편성을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 시도에서 무리한 복지예산으로 인한 파열음이 잇따르고 있다. 나는 홍 지사의 무상급식 거부를 비판하지 않았던 만큼 교육감들의 누리과정 예산 편성 거부를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걸로 믿는다. 그런데 청와대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안종범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9일 “무상급식은 법적 근거가 없는 지자체와 교육청의 재량사업”이라며 “의무적으로 편성하지 않아도 되는 사업은 예산을 대폭 늘리고 누리사업에는 예산을 편성하지 못하겠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누리과정 예산을 희생시킨 무상급식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무상급식 역사를 되짚어 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필자가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을 인터뷰했을 때 그는 당시 박근혜 의원과 김문수 경기지사가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는 데 대해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다. 결국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에 직(職)을 걸었던 오 시장이 물러난 뒤 박근혜 의원은 “무상급식은 지자체 형편에 따라 시행하면 될 것”이라면서도 오 시장이 주민투표 결과와 시장 직을 연계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무상급식은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한 오 시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무상급식은 2009년 당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화두를 꺼냈고 2010년 교육감 선거 당시 곽노현 서울시 후보의 대표 공약이었다. 민주당이 “애들 밥 한 끼 먹이는 것도 못하느냐”고 주장하자 새누리당의 전열은 맥없이 무너졌다. 한국인의 정서에 와 닿은 ‘밥 한 끼’의 힘은 컸다. 박 대통령은 무상급식 도입에 주연은 아니더라도 조연 비중은 차지했다. 이제 와 누리과정이 무상급식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무상복지 예산 파동과 관련한 박근혜 정부의 책임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복지를 확대하면서도 ‘증세는 없다’고 강조했고 그 기조는 이어지고 있다. 총선 대선 과정에서 야권은 새누리당보다 더 많은 복지공약을 내걸었지만 증세도 주장했다는 점에서 야권이 지금의 박근혜 정부보다 덜 비겁했다고 나는 본다.
그렇다고 야권의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건 차근차근 밟아가야 할 복지계단을 건너뛰고 무상급식을 먼저 도입한 점이다. 우리의 보편복지 도입 순서를 보면 무상급식-누리과정-기초연금 순이다. 기초연금은 하위 70%에 도입돼 보편복지라고 할 수 없지만 선별복지도 아니므로 ‘맞춤형 보편복지’라고 하자. 아동수당-기초연금 순으로 도입된 영국과 비교해 우리는 복지의 방향, 순서, 속도 모두가 잘못됐다. 북유럽에서만 시행하는 무상급식이 먼저 도입됨으로써 우리 복지는 큰 밑그림 없이 중구난방 꼬이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홍 지사가 무상급식을, 진보 진영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누리과정을 포기한 걸 보면 정치권은 이 와중에도 내 편, 네 편을 따지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재정 파탄은 둘째 치고 정말 복지 혜택이 절박한 빈곤층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 ‘복지의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현재의 복지 디폴트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무상급식의 반대는 무상보육(누리과정)이 아니라 선별급식이다. 마찬가지로 영유아 교육인 누리과정의 대척점에는 무상급식이 아니라 반값등록금(고등교육)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누리과정도 하고 반값등록금도 한다고 한다. 뒤죽박죽이 된 복지파동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보편복지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무상급식이 나온다. 애들 밥 한 끼의 대가가 정말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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