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허진석]11월 11일의 ‘1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1일 03시 00분


허진석 채널A 차장
허진석 채널A 차장
에르메스재단의 초청으로 최근 한국을 찾은 한 젊은 영국 현대미술가. 그녀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간에 늘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며 자신의 관심사를 들려줬다.

그러면서 윤초 얘기를 꺼냈다. 지구의 자전속도와 원자시계의 차이를 보정하기 위해 1년에 한두 번씩 1초를 더하거나 뺄 일이 생기는데, 지금까지는 1초가 더해지는 ‘양의 윤초’만 있었단다. 그런 때에 특정 도시의 불을 1초 동안 일제히 끄는 행위예술을, 9년 동안 행정관청과 씨름한 끝에 결국 실행했노라고 들려줬다.

어린 시절, 오늘처럼 11월 11일이 되면 11시 11분 11초에 손목의 디지털시계를 주의를 집중해 들여다봤다. 시계 속에 모든 숫자가 ‘1’로 변하는 그 순간은 특별해 보였다.

소련의 곤충 분류학자인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가 1972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는 70여 권의 학술서적과 1만2500여 장에 달하는 연구논문 등 엄청난 저술을 남겼다. 그 속에는 자신이 사용한 시간을 분단위로 기록하며 관리한 ‘시간 통계 노트’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광적인 시간관리가 다작의 원천임을 알게 됐다.

세슘 원자시계로 측정하는 시간은 거의 오차가 없어, 우리는 1000년에 0.003초 이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시간은 과연 균일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시간을 다루는 철학자들은 과감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만약 시간이 흘러간다고 하면 그것이 똑같은 간격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자연과학을 공부한 기자에겐 성립될 수 없는 질문처럼 들렸다. 그러나 지루하고 힘든 일을 겪을 때와 흥미롭고 즐거운 일을 할 때 다른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면, 유치한 수준에서 그 철학자의 질문을 떠올리곤 한다.

시간관리는 자기 계발과 늘 연결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겨 탐탁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순 없다. 시간의 흐름이 똑같은 간격이든 아니든, 우리는 관리를 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최근 한 광고에 ‘가족시간 계산기’가 나왔다. 30대의 젊은 사람이라도 남은 시간이 5개월뿐일 수 있는 것이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평생의 시간’이다. 하루 중 일하는 시간, 출퇴근 시간, 자는 시간, 친구를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은, 수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짧다.

류비셰프는 자신의 일과를 일일이 손으로 기록해야 했지만 요즘은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으로 이를 간단히 이를 실현할 수 있다. 자신이 방금 사용한 시간이 자신의 꿈, 즐거움, 사랑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를 구분해 주는 것도 있다.

가족시간 계산기를 보고도, 여태 계산해보지는 못했다. 두렵기 때문이다. ‘꿈’이나 ‘즐거움’ 시간 계산기가 있다면 그 결과는 또 어떨까. 고개를 당당히 들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허진석 채널A 차장
#에르메스#윤초#시간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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