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가지에 감 하나 달려 있다 오래도록 묵은 세월이 잔가지에 쌓여가는 동안 나도 어느새 손 매듭이 굵어졌다 감나무가 저만큼 자라도록 봄이면 꽃을 낳아 가을이면 하늘 흥건하게 기르도록 나는 감나무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깨가 빠지도록 망치질만 했다 짓무른 눈빛이 아주 어두워져 내가 헐벗은 나무의 그림자 아래 흔들릴 때 그제서야 나는 농익은 감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항시 일몰의 황혼이거나 달빛 그윽한 밤이었다 딱딱한 밥을 우물거리던 목구멍에서 눈시울까지 한 방울씩 붉게 번지는 노을을 적셔두고 저 혼자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부리 끝에 어둠을 물고 펄럭이는 잎사귀여 내 가뭇없는 기억 속으로 돌아오라 지금, 창밖에 찬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고 치부처럼 드러난 몸의 궁색함이 발등 끝에 마른 껍질로 굳어지는 11월 달이 월식을 하듯 그렇게 나도 내 얼굴을 지워가리라
‘오래도록 묵은 세월이 잔가지에 쌓여가는’, 나이 많은 감나무에 감 하나가 달려 있다. ‘감나무가 저만큼 자라도록/봄이면 꽃을 낳아 가을이면 하늘 흥건하게 기르도록/나는 감나무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다. 그동안 ‘어깨가 빠지도록 망치질만 했’단다. 먹고 살자고 고된 노동을 하느라 감나무의 파릇한 봄이며 흐드러지게 감을 매단 가을이며 돌아볼 새 없었단다. 이제 ‘짓무른 눈빛이 아주 어두워져’서야 농익은 감 하나를 바라본단다. ‘어느새 손 매듭이 굵어’진 화자와 감나무의 11월. 감나무는 화자에게 제 영혼이랄지 시의 표상이기도 할 테다. 화자는 ‘일몰의 황혼이거나/달빛 그윽한 밤’, ‘딱딱한 밥을 우물거리며’ 마른 가지 사이에서 지는 해 같은 주홍빛 감을 바라본다. 울컥, ‘목구멍에서 눈시울까지’ 치밀어 오르는 슬픔이 노을처럼 ‘한 방울씩 붉게 번’진다.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든 게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단다. 그 말은 거의 모든 게 사라진 달이란 뜻이기도 하겠다. 11월, 헐벗은 풍경을 바라보는 헐벗은 마음…. 몸도 마음도 시린 11월의 서정이 마른 잎처럼 바스락거리는 시다. 임성용은 2002년에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직업이 노동자일 테다. 미화원이나 경비원 등 생활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 그리고 건축 현장이나 공장 등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의 영혼과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서정을 잃지 않고 시를 쓰다니 머리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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