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는 월스트리트저널 사설 제목처럼 확실히 버락 오바마에게 ‘한 방(shellacking) 먹인 격’이 되었다. 사실 이번 결과는 누가 봐도 예견된 것이었다. ABC방송 출구조사를 보면 오바마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재선 당시인 2012년 때보다 10% 떨어진 44%였다.
이를 일찌감치 눈치 챈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택한 전략은 교묘하게 오바마와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그와 연결 짓는 즉시 표 떨어지는 소리가 뚝뚝 들렸기 때문이다. 조지아 주 상원의원 후보 같은 이는 상대 당인 공화당 출신 전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와 자신이 정치색을 같이한다고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녔을 정도였다. 오바마 대통령의 지원 유세도 상원의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주지사 선거 유세에나 동원됐을 뿐이다. 그것도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인 메릴랜드 주나 메인 주 같은 곳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도 공화당 후보들이 주지사로 당선되어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오바마가 이번 선거에서 아무런 힘을 보태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발군의 힘을 발휘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정치헌금 모금 현장이었다. 그는 거부들을 겨냥해 전국의 모금 현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오바마는 6년의 재임 기간 동안 어느 전임 대통령보다도 더 자주 모금 행사에 나타났으며 올 들어서만 40회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이런 그의 행보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다.
우선 해결해야 할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데 백악관을 수시로 비우면 국정 수행은 언제 하느냐는 것이다. 또 거부들이 모인 장소에서 오바마가 단골 메뉴로 올린 것이 그들은 안중에도 없는 친중산층 의제였으니 이는 웃기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오바마가 써먹을 카드는 그것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사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그 카드는 약발이 먹혔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국민들은 이제 그의 친중산층 정책 화두가 단지 입에 발린 수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미국 정치를 우려하는 가장 큰 화두가 ‘금권정치’이다. 오바마는 그 물결의 정점에 서 있다. 이번 선거는 금권정치가 만개한 듯 보였다.
주지하다시피 이미 미국은 대법원이 2010년과 올해 4월 후보의 외곽단체 격인 이른바 슈퍼팩(super PACs·정치활동위원회)에 개인이 기부할 수 있는 정치자금 한도를 아예 없애 버렸다. 그러다 보니 슈퍼팩 등을 통한 정치 자금이 봇물 터진 것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이런 돈의 규모가 이번 선거에서는 약 6억8900만 달러(약 7200억 원)로 2010년 중간선거 때의 약 2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USA투데이는 그중 2억 달러는 고작 42명의 부자가 낸 것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그 액수는 단지 추정일 뿐이다. 왜냐하면 슈퍼팩에 기탁된 정치자금 규모와 지출 내역은 신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출처가 묘연한 ‘눈먼 돈(murky money)’이기 때문이다. 규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런 돈을 정치인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그럴수록 정치에 있어 대부호들의 입김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을 해보자. 그런 슈퍼팩을 누가 만들었는가? 바로 정치인들이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하도록 뒤에서 조종한 자들은 바로 로비스트들이다. 그리고 로비스트들 뒤에는 소수의 부호들이 있다. 한마디로 금권정치가 노골화되는 모습이다. 이것은 누가 봐도 검은 자금을 합법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슈퍼팩은 말이 정치기부금이지 결국은 뇌물이랑 성격이 다르지 않다. 거간꾼인 로비스트에게 들어가는 중간 수수료를 빼고 직접 돈을 가지고 정치인들을 쥐락펴락하겠다는 부자들의 야욕과 정치인들의 협잡이 빚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도의 일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 아니냐고 딴죽을 거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미리 말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미국처럼 대놓고 정치자금 기부의 한계를 법으로 풀어 버린 나라가 과연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오바마도 2010년 무제한 기부를 허용한 법원을 ‘민주주의의 적’이라고까지 맹비난하며 그런 더러운 모금 행사에 결코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약속을 파기하고 부지런히 모금 행사에 참석했다. 그것도 순전히 소속 당을 위한 행사에 대통령 전용기를 동원하는 등 혈세까지 낭비하면서 말이다. 번듯한 공식적인 장소에서 모금한 것도 아니다. 그가 모금하러 다닌 장소는 대기업 회장이나 부호들의 사저였다. 올 7월 시애틀에서 열린 민주당의 상원 장악을 위한 슈퍼팩은 전 코스트코 최고경영자(CEO) 집에서, 그리고 그 일주일 전 있었던 하원 장악을 위한 슈퍼팩은 맨해튼의 한 개인 집에서 벌어졌다. 로스앤젤레스의 슈퍼팩 모금은 ABC방송의 드라마 ‘스캔들’의 제작자 집에서였다.
오바마가 모임에 참석은 했지만 결코 기금 모금을 하지 않았다는 백악관과 슈퍼팩 관계자들의 옹색한 변명을 듣다 보면 한 편의 웃지 못할 ‘촌극(silly farce)’(뉴욕타임스 데이비드 파이어스톤 칼럼)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혹시 참고가 될까 싶어 부연한다. 로스앤젤레스 슈퍼팩 모금 장소에 입장하고 대통령과 사진 촬영하는 데에 1만 달러, 저녁 식사가 포함되면 2만 달러, 공식 초대장에 이름이 오른다면 최하 3만2400달러다. 물론 10배 이상 내는 것은 자유다. 파이어스톤은 “이제 미국 정치에서 거금의 남용을 오바마와 민주당에만 일방적으로 종식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고 한탄한다.
슈퍼팩의 마수는 공화당에도 걸려 있긴 마찬가지다. 파이낸셜타임스의 크리스토퍼 콜드웰은 이런 현상이 정말로 ‘불온한 전개(ominous development)’라며 “길게 볼 때, 분명 ‘금권정치의 전조(harbinger of plutocracy)’”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슈퍼팩에서 모금된 돈은 이번 선거에서 초접전 경합지역에 무차별적으로 살포되어 상대방의 비방과 흑색선전에 사용되었다. 시민들의 흥겨운 축제가 되어야 할 이번 선거가 시민들에게 철저히 외면된 이유다. 시민들이 얼마나 무관심했으면 선거 당일 투표장에서 하프 연주를 하고 크루아상과 커피를 먹으며 심지어 스테이크를 굽는 장면까지 뉴스로 내보냈을까. 이것이 지금 미국정치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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