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저기 가을이 저물고 있다. 이맘때쯤 주당(酒黨)들은 자글자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 그중에서도 ‘곰삭아 깊은 맛이 우러나는’ 묵은지김치찌개를 그리워한다.
‘묵은지.’ 오래된 김장 김치를 말한다. 묵은지 중에서도 숙성 기간이 비교적 짧은 건 찌개로, 오래된 건 쌈이나 찜 요리에 제격이다. 땅속에서 2, 3년 묵은 김치가 그중 최고란다. 그러고 보니 묵은지로 만든 음식만 해도 등갈비찜, 꽁치찜, 삼겹살찜, 고등어조림 등 다양하다.
묵은지는 입맛만 사로잡은 게 아니다. ‘주택시장 기지개 켜자 건설사들 묵은지 분양.’ 신문은 건설사들이 묵혀두었던 알짜 물량을 묵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묵은지는 사전엔 표제어로 올라있지 않다.
왜일까. 묵은지에 붙은 ‘지’를 사투리로 보기 때문이다. 사전들은 하나같이 ‘지’를 경북과 전라도 등지에서 쓰는 김치의 사투리라고 규정한다. 이는 언중의 말 씀씀이와는 거리가 멀다. 오이지 짠지 젓국지 등 김치를 뜻하는 ‘지’가 붙은 낱말들을 모두 표준어로 인정하면서 묵은지만 배척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싱겁다’에서 나온 싱건지 역시 싱건김치와 동의어로, 국물김치의 전라도 사투리라고 하면서도 표제어로 올려놓고 있다. 물김치는 생긴 지 그리 오래된 말도 아닌데 표준어 대접을 받고 있다. 결국 묵은지에만 엄격한 표준어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셈이다.
세계의 음식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김치는 한자어 침채(沈菜)에서 왔다. ‘절인 채소’ 또는 ‘채소를 절인 것’을 뜻한다. 침채를 중국에서 만든 한자어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어다.
김치와 관련해 구별해서 써야 할 표현이 있다. ‘시다’와 ‘쉬다’가 그렇다. 너무 숙성돼 신맛이 나면 ‘신 김치’이고, 그 단계를 지나 냄새까지 난다면 ‘쉰 김치’라고 해야 옳다. 또 하나. ‘사랑으로 담은 김치’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김치는 ‘담는’ 게 아니라 ‘담그는’ 것이다.
소외계층의 겨울나기를 돕기 위한 사랑의 김치 만들기 행사가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는 소식이다. 김장문화는 지난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김치가 등재된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담그고, 나누는 과정, 즉 우리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김장문화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푹 곰삭은 맛이 일품인 묵은지야말로 문화유산에 걸맞은 김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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