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에 디플레이션(deflation)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2%로 사상 처음 2년째 1%대를 기록했다. 생산자물가 상승률은 두 달 연속 마이너스다. 생산자물가가 1, 2개월 후 소비자물가에 반영되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물가 하락이 예상된다. 선진국들에서 시작된 ‘D의 공포’가 한국으로 번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디플레이션이란 물가가 하락하고 경제 활동이 크게 침체하는 현상이다. 당장은 물건값이 싸지니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inflation)보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물가가 이어지면 소비자가 구매를 안 하고 생산과 기업 활동이 위축돼 경제 전반이 침체의 늪으로 빠진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단적인 사례다.
세계 경제는 디플레이션에 짓눌린 지 오래다. 일본은 아베노믹스로 경기가 잠깐 반짝했다가 다시 두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유럽은 이미 성장률 0%대로 신음하고 있다. 중국마저 공장 출고가(생산자물가)가 32개월째 떨어지는 심상찮은 조짐을 보인다. 일본은 내년 10월 예정됐던 소비세 추가 인상을 철회하고 양적 완화를 강화할 태세다. 유럽중앙은행도 1조 유로(약 1370조 원) 규모의 양적 완화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하는 등 디플레이션과의 전쟁에 나섰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와 한국은행은 인플레만 무서워하던 과거 고도성장 시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년 연속 물가가 하락하면 디플레이션으로 본다. 한국은 아직 그 단계가 아니고 물가 상승률이 눈에 띄게 하락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 수준이지만 안심하면 안 된다. 실제로 디플레이션에 빠지면 손을 쓰기 어렵다. 일본은 1992∼1993년 연속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대를 보였는데도 대응을 머뭇거리다 장기 침체를 맞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말로만 “디플레와 싸워야 한다”고 할 게 아니라 좀더 과감한 정책을 검토해야 한다. 한은도 보다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펼 필요가 있다. 국회도 기업투자와 민간소비 촉진을 위한 법안들의 조속한 처리로 협조해야 한다. 지금은 모두가 합심해 물가하락과 경기침체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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