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부터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이건 처녀에게 폭력적인 것일까, 언어폭력일까. 내가 알던 처녀는 모두 아줌마로 갔다. 처녀가 알던 남자도 다 아저씨로 갔다. 하이힐 위에서 곡예하듯 가는 처녀도 아줌마라는 당당한 미래를 가졌다. 퍼질러 앉아 밥을 먹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아저씨를 재산목록에 넣고 다니는 아줌마, 곰탕을 보신탕을 끓여주고 보채는 아줌마, 뭔가 아는 아줌마, 경제권을 손에 넣은 아줌마, 멀리서 봐도 겁이 나는 아줌마, 이제 아줌마는 권력의 상징, 그 안에서 사육되는 남자의 나날은 즐겁다고 비명을 질러야 한다. 비상금을 숨기다가 들켜야 한다. 피어싱을 했던 날을 접고 남자는 아줌마에게로 집결된다. 아줌마가 주는 얼차려를 받는다.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란 말은 지독히 아름답고 권위적이다. 어쨌거나 아줌마는 세상 모든 처녀들의 미래, 퍼스트레이디
가끔 만나 시 얘기를 나누며 밥을 먹는 모임이 있다. 요즘 그 일원 중 두 친구 사이가 벌어졌다. 사연인즉, 오십대 ‘아저씨’인 친구가 삼십대 ‘아줌마’인 친구에게 “이 아줌마가!?”라 했다는 것이다. “농담으로 그런 거예요. 사과를 해도 안 받아주네요. 그게 그렇게 마음 상할 말인가요?” 당황한 오십대 ‘아저씨’의 하소연을 들으며 해맑은 그녀 얼굴을 떠올렸다. 평소 유순한 그녀가 그토록 발끈하니 더 놀랐을 테다. 남자들은 모르리. 아줌마들도, 특히 청순한 외양의 아줌마일수록, ‘아줌마’라 불리는 걸 언짢아한다는 것을. ‘아줌마’의 사전적 뜻은 ‘어른 여자를 홀하게 또는 정답게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대개 ‘홀하게’ 쓰인다.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성이 있단다. 남자, 여자, 그리고 아줌마. 물욕이건 육욕이건 거침없이 밝히는 뻔뻔스러움으로 실속을 차리는 드센 모습이 아줌마에 대한 통념이다. 화자는 ‘아저씨’의 시각으로 그 통념을 ‘당당하다’, ‘뭔가 안다’, 실제 ‘권력의 상징’이다, 라고 치켜세운다. 처녀들이여, 아줌마가 얼마나 좋은 것이냐! 그런데 처녀가 그리 살 만한 아줌마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아줌마라고 불려서는 곤란할 테다. 지금은 ‘하이힐 위에서 곡예’를 할 때!
이 시가 실린 시집 ‘그리운 파란만장’ 표제시에서 시인은 ‘파란만장하니 인생이다’, ‘파란만장아 고맙다, 파란만장하니 고맙다’고 노래한다. 생의 질곡이야말로 생을 생생하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전하는 시인이 온몸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 ‘아줌마’에게 바치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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