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미국에선 수능 오류가 없다고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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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중산층 현장보고서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

미국 SAT를 주관하는 칼리지보드가 들어선 뉴욕 맨해튼의 건물. 동아일보DB
미국 SAT를 주관하는 칼리지보드가 들어선 뉴욕 맨해튼의 건물. 동아일보DB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보스턴대 사회학 박사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보스턴대 사회학 박사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오류 논란이 일자 미국에서는 우리 같은 일이 없으니 미국 시스템을 당장 도입하자는 주장이 들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뭘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문제는 오히려 미국 시스템을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수능이라 할 수 있는 SAT 출제기관은 한국과 엄연히 다르다. SAT를 주관하는 곳은 대학협의체(칼리지보드)이고 시행하는 곳은 교육평가원(ETS)이다. 이 기관들은 우리처럼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이 아니라 사기업체(private company)이다.

미국 SAT는 시험문제와 답안을 외부에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나라 자동차 운전면허 필기시험처럼 여러 개의 문제를 만들어 놓고 돌려가면서 출제를 하는 문제은행식으로 운영한다. SAT가 이렇게 치러질 수 있는 이유는 미국 학생들이 우리처럼 입시 준비에 목을 매다시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에선 한국식으로 SAT 학원을 보내는 극성 한국 교포나 기러기 부모들이 있지만 원래 미국 학생들은 기출 문제집을 죽어라 풀어대며 시험 준비를 하지 않는다. 아니, 기출 문제집이란 것이 아예 없다. 있다면 불법이다. 문제를 유출한 것이니 말이다. SAT를 보고 나온 수험생들의 기억을 토대로 문제집을 만들어 강의하는 한국 학원들이 부정행위로 고발당하는 이유이다.

미국의 칼리지보드나 ETS는 한마디로 ‘시험문제’라는 상품을 통해 장사를 하는 기업들이다.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겨 각 학교에 학생의 점수를 통보하는 대가로 각종 수수료를 챙긴다. 하지만 대학들이 이들과 손을 잡고 여기서 나온 결과만을 입시에 반영하니 미국 학생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기관들은 SAT보다 대학 입학 사정에서 더 유리하게 작용하는 AP 과정(고등학교에서 하는 대학 수준의 선행과목 이수시험)까지 관할한다. 이들이 시험시장을 독과점으로 운영하며 학생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제대로 검증도 안 된(그리고 할 수도 없는) 문제를 돌리고 돌리면서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이는 행태에 대해 비판 여론이 높다. 실제로 응시 때 학생들이 제시한 각종 학생 정보를 외부에 돈을 받고 파는(한 명당 0.37달러) 파렴치한 행각이 발각돼 현재 소송을 벌이고 있다.

보수도 엄청나다. CNN 보도에 따르면 2009년 칼리지보드 임원 19명이 1인당 연봉 30만 달러(약 3억3000만 원) 이상의 고액을 받았고 당시 회장은 130만 달러(약 14억4000만 원)를 챙겨갔다. 자기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은 되도록 기밀에 부치고 종업원들에게 입단속을 시켜 밖으로 유출하지 않는 데 애를 쓰는 것은 사기업체의 생리이다. 따라서 미국에는 출제 오류가 없는 게 아니라 있다 해도 유출되지 않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기관들이 학생들 학력 향상에라도 일조했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다. 며칠 전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이들이 출제한 SAT를 보고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 중에서 영어, 수학, 과학 등에서 기초 학력이 모자라 다시 고등학교 수준의 보완수업(remedial course)을 듣는 대학생 수가 1999년 100만 명에서 2011년 270만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아무 변별력이 없는 우리 ‘물수능’처럼 SAT도 ‘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미국 제도를 도입하자는 말이 쉽게 나올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미국 사정을 잘 모르고 우리에게 쉽게 접목시키려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된다. SAT도 그렇지만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사교육 시장을 왜소화시키고 학습 부담을 줄인다는 명분으로 내세운 ‘EBS 연계 수능’도 미국식 ‘문제은행’을 흉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어떤 결과를 빚고 있는가. 너도나도 대학 가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마당에 수험생들은 EBS까지 준비하느라 난리 법석이다. 자신이 취약한 과목에 대해서는 따로 사교육을 받고 EBS 기출문제를 덤으로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영어 시험을 한국어 해설지를 보고 지문 내용을 외운 뒤 치르는 기이한 일까지 있다. EBS 수능 연계의 또 다른 폐단은 출제위원들이 졸속으로 만들어진 EBS 교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출제 오류 논란이 안 나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이참에 교육과정평가원도 짚고 싶다. 평가원이 공공기관이라고는 해도 운영 면에서 공공성을 벗어난 지 오래다. 요즘 여론에서 전하는 ‘서울대 사범대 마피아’ 때문이다.

필자도 평가원이 주관한 시험 출제위원으로 딱 한 번 참여하면서 평가원의 운영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참여 교수들이 거의 특정 학교 선후배이고, 간혹 구색 맞추기로 다른 대학 출신을 몇 명 끼워 넣는 식이었다. 어떤 교수들은 출제위원이 되고 싶어 평가원에 줄을 대려 안달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출제위원으로 선정되면 합법적으로(?) 강의를 빼먹을 수 있고 월급 외에 세금도 안 내는 부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 번 평가원과 인연을 맺으면 거의 매년 계속 맡는 경우가 많으니 한마디로 한국 정서상 평가원은 ‘갑’으로 행세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런 판국에 문제 출제 및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출제위원 교수들은 많게는 1년에 한 달을 문제 출제에 에너지와 시간을 쓰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학자적 실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수능 문제 오류 논란을 끝내려면 대대적으로 평가원 및 출제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 일단은 ‘서울대 사범대 마피아’ 소리가 못 나오게 사람을 섞어야 한다. 출제 방식도 박사급 인력을 평가원 직원으로 채용해 일선 교사들과 함께 출제를 하게 한 뒤 교수진은 최소 인력이 투입돼 최종 감수만 하도록 하는 게 좋다고 본다. 지금 각 대학에 전임 교수가 못 된 비정규직 박사 강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왜 그들을 활용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정부가 EBS 연계 수능 방침을 밝힐 때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헤드폰을 끼고 컴퓨터 앞에 앉아 EBS 강의를 듣는 신문 사진이 떠오른다. 필자는 그때 우리 학생들이 학생이 아닌 닭 공장의 알 낳는 닭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창조경제 운운하지만 이런 비교육적 상황에서 창조적 인재가 나올 수 있겠는가.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보스턴대 사회학 박사
#수능#SAT#칼리지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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