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짜게 먹었다 싶어 슬리퍼 끌고 슈퍼 가는 길 환하게 불 밝힌 슈퍼 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주인 백 팻말이 손잡이에 걸려 있다
잠시라는 문구에 등 돌리지 못하고 발자국으로 보도블록 위에 꽃판을 만들고 있는데 잠시 만에 돌아올 수 있는 무언가를 많이도 버려 둔 것만 같기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시절에 저 팻말을 잠시 빌려 걸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데 시린 발끝으로 꼭, 꼭, 꽃판을 수 겹으로 만들어도 주인은 오지 않고 잠시만으로 턱없이 부족한,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발걸음을 한없이 머물게 하고
고개를 드니 슈퍼 안이 환했다가 어두워지는 것을 다 지켜봤을 회화나무, 쉬지 않고 물을 퍼 날랐을 물관도 어느 나무 속의 아늑한 습기를 잠시라도 방문하고 싶었을 터
야윈 가지 사이 별들이 환한 밤 마음도 잠시 마실 갔다 온 것처럼 말개져 있었다
식당에 들어설 때는 날이 환했는데 국수 한 그릇 먹고 나오니 어두컴컴하다. 순식간 밤의 긴 여로를 지나온 듯 이상하고 쓸쓸한 기분으로 시계를 보니 여섯 시도 안 됐다. 이제 차차 이 어둠의 시차에 익숙해질 테다. 저녁을 먹은 뒤라면 깊은 밤처럼 캄캄할 한겨울, 화자는 집 근처 슈퍼에 간다. ‘저녁을 짜게 먹었다 싶어’라니 페트병에 든 생수라도 살 생각이었겠다. 그런데 슈퍼 문은 닫혀 있고 그 손잡이에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란 팻말이 걸려 있다. 화자는 ‘잠시라는 문구에 등 돌리지 못하’는 사람. ‘잠시’라는데 그걸 못 기다리고 다른 가게에 갈 수야 없지. 슈퍼의 환한 불빛이 거리를 밝히고, 화자는 눈 쌓인 보도블록 위에 꽃 모양으로 발자국을 찍으며 슈퍼 주인을 기다린다. ‘슬리퍼를 끌고’ 잠시 나선 길이 이리 오래 걸릴 줄이야. 잠시라더니 대체 언제 올 거야? 약이 오르기도 하련만, 목마른 것도 잊고 화자는 하염없이 ‘시린 발끝으로 꼭, 꼭, 꽃판을 수 겹 만들’며 언제까지라도 머물 태세다. ‘잠시’라는 말이 불러일으킨 상념에 화자 마음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어느 시절’의 ‘아늑한 습기’에 젖어든다. 아, 머물고 싶었던 순간들,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들, 어쩌다 그냥 스쳐 보내고 아득해졌을까. ‘잠시’…, 머묾도 헤어짐도 평생 가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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