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초등학생 할머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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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은 반전이 있어서 재미있다. 예전에는 밭보다 논이 비쌌지만 대지 전용이 쉬운 밭이 논값을 앞지른 것은 한참 전 이야기다. 그리고 요즘 농촌에서는 할머니가 경로당에 계신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손자뻘 아이들과 함께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기도 한다.

전북 고창 미당문학관에 갔다가 그 근처 봉암초등학교에 다니는 한영자 할머니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자녀들은 출가해 도시로 나갔기 때문에 혼자 살고 있는 이 할머니는 올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전주에 사는 큰아들이 엄마의 입학을 기념하여 사드린 주황색 가방과 운동화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칠십 평생 한글을 모르는 까막눈으로 살다가 1학년 과정이 끝나가는 요즈음에는 버스정류장 표지판도 읽을 수 있고, 자기 집 우체통에 쓰인 ‘한영자’라는 글자가 본인의 이름인 줄도 알게 되었다며 신기해했다. 국어 공책을 보니 글씨가 얼마나 또박또박 얌전하고 반듯한지 평생 야무지게 살림해 온 솜씨가 그대로 드러난다.

전교생이 40여 명인 그곳 봉암초등학교에는 할머니 학생이 두 명이라고 한다. 제 나이에 입학하는 어린이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한꺼번에 많이 뽑지 않기 때문에 대기자도 있다고 했다. 60, 70년 전 특히 시골에선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완고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기에 무학의 할머니가 많은 것이다.

일흔두 살이 되어 처음으로 써본 자기 이름. 그리고 교실에서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 ‘한영자!’라고 이름을 불리는 즐거움.

이제까지는 ‘전주댁’이라든지, 누구네 엄마나 할머니였을 뿐 자기 이름을 잊고 산 한영자 할머니는 이름을 불린다는 것에 감격했다. 이렇게 뒤늦게 학교에 다니며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의 글짓기 중 ‘내 기분’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이웃집 할망구가/가방 들고 학교 간다고 놀린다/지는 이름도 못 쓰면서/나는 이름도 쓸 줄 알고/버스도 안 물어보고 탄다/이 기분 니는 모르제’

그 기분 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평생 허리 구부려 일해서 자녀들을 대학까지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우리의 어머니 세대. 남부끄럽게 물어보지 않고도 버스를 탈 수 있다고 뿌듯해하는 할머니를 보면서 나도 흐뭇했다. 까막눈을 번쩍 뜨고 세상을 읽을 수 있게 된 전국의 초등학교 1학년 할머니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윤세영 수필가
#할머니#까막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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