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를 읽을 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그의 예술적 성취 위에, 그 자신이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고 변명한 생애의 왜소함이 포개지기 때문이다. 그의 시적 자아와 정치적 자아가 일치했는지는 그 자신만이 아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정주의 시세계에서 미적(美的) 뛰어남이 정치적 올바름과 무관하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경험한다. 서정주는 20세기 한국 시문학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다. 그리고 그가 기다란 시력(詩歷)을 통해 태작을 거의 내놓지 않은 매우 드문 시인이었다는 사실과 별도로, 첫 시집이 가장 뛰어난 시집이 되는 수많은 시인들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화사집’은 서정주의 첫 시집이자 가장 뛰어난 시집이다. 모국어로 표현된 감각의 깊이에서 이 시집과 대적할 시집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화사집’의 시 한 편 한 편은 탐미(耽美)를 향해 질주하는 모국어의 정화(精華)다. 예컨대 이 시집의 표제작 ‘화사’에서 시인이 사향과 박하와 방초와 징그러우면서 아름다운 배암과 고양이 같이 고흔 입설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읽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느낀다. ‘화사’의 언어들은 미약(媚藥)을 바른 화살들처럼 우리에게 날아와 몸 깊숙이 꽂히고, 그 순간 우리 몸은 가눌 수 없는 어지럼증으로 비틀거린다. 탐미가 예술의 전부는 아니지만, 탐미 없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화사’는 한국어로 표현된 예술의 끝 간 데다. 적어도 탐미의 끝 간 데다. 문학책 광고 카피에 너무 자주 쓰여 상투어가 돼버린 표현을 말의 가장 엄정한 의미에서 다시 쓰자면, ‘화사’는 한국어에 벼락처럼 내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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