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휴대전화로 전해진 이금형 전 부산지방경찰청장(56·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침 그는 전날(3일) 퇴임하면서 가져온 책을 정리 중이었다. 1977년 시작된 이 전 청장의 경찰 생활이 37년 만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경찰로서 그의 인생은 화려했다. 역대 세 번째 여성 총경, 두 번째 여성 경무관, 첫 번째 여성 치안감 및 치안정감(치안총감인 경찰청장 바로 아래 계급)까지…. 이 전 청장은 경찰 생활 내내 ‘여경(女警)의 대모’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았다.
그의 존재감이 더욱 큰 이유는 경찰의 말단인 순경 출신이기 때문이다. 하위직 시절 치안 현장의 밑바닥을 경험한 것은 이 전 청장이 자랑하는 가장 큰 자산이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 마포경찰서장 때 ‘발바리(연쇄 성폭행범) 사건’을 해결했고 여성 및 학교폭력 피해자 원스톱지원센터도 만들었다. 승진시험 때 치열한 경쟁을 뚫고 1등도 했다. 이 전 청장은 “(진급할 때마다) ‘여자가 순경으로 들어와서 그 정도 하면 됐지’라는 말을 질리게 들었다”며 “후배뿐 아니라 사회 곳곳의 나 같은 여성들을 생각해 정말 독하게 일했다”고 털어놨다.
이 전 청장은 하위직 출신으로서 유리천장을 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마냥 기분 좋게 볼 수가 없다. 그의 퇴임으로 현재 치안감 이상 경찰 고위직에는 순경 출신이 없다. 그보다 한 계급 아래인 경무관 중에도 순경 출신은 고작 2명이다. 물론 순경 출신이라고 무조건 특혜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조직 안팎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이들조차 아예 검증 후보군에 끼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때마다 경찰이 내세우는 이유는 비슷하다. “승진을 시키려 해도 마땅한 사람이 없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 효과가 낮다”는 것.
현재 순경 출신은 전체 경찰(약 11만 명)의 약 97%다. 이들이 경위 계급장을 다는 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 15년. 극소수이지만 총경(경찰서장)이 되기까지는 30년 가까이 걸린다. 경찰대, 간부후보, 고시특채 등 이른바 3대 경로 출신은 경위나 경감 경정에서 시작한다. 순경과 3대 경로 출신은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야 승진이 가능한 ‘승진 소요 기간 제한’ 등을 똑같이 적용하면 앞으로 순경 출신 고위직은 구경하기 힘들어진다. 조만간 단행될 경무관 승진 후보군에도 순경 출신이 한 명도 없다는 소문이 안팎에서 돌고 있다.
무조건 특혜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97%의 직원들이 더 큰 꿈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자는 것이다. 이루기 힘들더라도 희망을 갖고 뛰어다니는 경찰이 현장에 많아져야 치안이 바로 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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