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을씨년스럽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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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날씨도 그렇고, 사회 분위기도 ‘을씨년스럽다’. 이맘때면 많이 쓰는 이 말, 어디서 왔을까. 낱말 구조를 보면 ‘을씨년+스럽다’이다. ‘을씨년’이라는 명사에 ‘그러한 성질이 있다’는 뜻의 접미사 ‘-스럽다’가 붙은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을씨년의 어원이 궁금해진다.

을씨년은 1905년 ‘을사년(乙巳年)’의 변형이라는 설이 꽤 유력하다. 을사년은 일제가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등 을사오적을 내세워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맺은 바로 그해다. 일제는 이 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정치를 실시했다. 이후 우리 민족은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거나 날씨가 우중충할 때면 을사년의 통탄스러운 분위기와 비슷하다 해서 ‘을사년스럽다’고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을씨년스럽다’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확실한 근거를 찾긴 어렵다. 조항범 충북대 교수는 이해조의 ‘빈상셜’(1908년)이라는 소설에서 ‘을사년시럽다’라는 말을 찾아내 을씨년이 을사년에서 왔다는 충분한 근거로 볼 수 있다고 했다(‘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이게 사실이라면 명쾌하긴 한데 생긴 지 100년밖에 안 된 말의 변천 과정이 다른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다는 게 의문이다.

을사조약은 ‘을사보호조약’이라고 해선 안 된다. ‘보호’라는 말은 일본이 자기나라 중심으로 붙인 사탕발림이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이 맞다. 늑약(勒約)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다.

북한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거나 매우 지긋지긋한 데가 있다’고 할 때 ‘을씨년스럽다’고 한다. ‘을씨년스럽게 스산하다’는 의미로 ‘을스산하다’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올 7월 중국 선양에서 열린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제21차 회의에서는 남북의 언어 이질화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남북의 일상용어 중 30∼40%가 다른 뜻이라고 하니 남북한 말이 서로 외국어가 될까 걱정이다.

‘-스럽다’를 붙이는 조어법은 요즘도 있다. 2003년경 검사들이 상식에 어긋난 일을 계속하자 ‘검사스럽다’는 말이 유행했고, 이 말은 그해 국립국어원 신어사전에까지 올랐다. 요즘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갑질’이 화제인데, 앞으로 ‘현아스럽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불교 용어가 있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이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이 계절만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을씨년스럽다#을사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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