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하나의 방처럼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여든 얼굴들이 기억의 영사기에 비춰오듯 흐릿하다. 딱히 언제 사진인지 짚어낼 순 없어도 앨범 속에 죽어 있던 풍경이 스며드는 방.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소는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사진 속의 일몰은 나의 창에 물들고 있다. 푸르게 젖어가는 옥양목 마당 너머에는 바라볼수록 여백이 넓어지는 하늘. 늦가을 바람에 창살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낸다. 녹이 먹어버린 문고리와 발바닥에 닳아 얇게 패인 문턱들. 몇 세대가 머물다 간 낡은 집으로 그들은 바람처럼 돌아와 바스락댄다. 슬픈 아이가 잠결에 따스한 체온을 느끼듯이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세대의 눈빛 안에 고여 있는 나의 눈이 어떤 슬픔을 꺼내놓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비워낸 시공간을 옮겨 적는 것. 잊었던 말들이 밀려온다. 스쳐가는 그림자의 방에서.
‘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사진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갈무리한 이런 앨범이 집집마다 다락이나 장롱 깊은 곳에 있었다. 가족 앨범은 대개 스냅사진으로 채워진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흘러갈 시공간을 찰칵찰칵 잡아채서 우리는 기억을 닳고 바래게 하는 시간의 물살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진으로 남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 삶이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생은 저마다 기록해 남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리라.
화자는 낡은 앨범을 보고 있다. 검은 마분지도 하얀 습자지도 바싹 말라 화자는 조심스레 앨범을 넘길 테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여든 얼굴들’, 오래된 과거와 가까운 과거가 모여 있는 앨범이다. ‘몇 세대가 머물다 간 낡은 집’, 조부모님의 젊은 모습, 아버지나 고모 삼촌의 어린 모습…, 잘 모를 사람의 모습도 있겠지만 모두 화자의 혈족일 테다. ‘세대의 눈빛에 고여 있는 나의 눈’, 당연히 그럴 테다. 이미 작고하셨건 구존해 계시건 그들은 어딘가 화자와 닮았을 테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소는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사진 속의 일몰은 나의 창에 물들고 있’단다. 사진 속의 풍경이 화자의 회상과 포개지며 현재 공간을 아스라이 물들인다. 오래된 가족 앨범을 보면서 제가 세상에 불쑥 던져진 돌멩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힘을 얻는 화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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