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살다 보면 별의별 게 다 그립지만 순대가 그렇게 먹고 싶을 줄은 정말 몰랐다. 어떤 순대인고 하니, 남원의 피 맛 나는 순대도, 토실토실 오동통한 아바이 순대도 아닌 동네 분식집에서 파는 싸구려 순대였다.
그 취향이 생긴 사연이 왜 없겠는가. 동네마다 반드시 하나씩은 있는 코딱지만 한 슈퍼마켓에 망나니처럼 놀다가 뒤늦게 철들었을 것 같은 총각이 분식 매대를 연 것이다. 작달막한 키, 검붉은 얼굴에 늘 야구 모자를 쓰고는 스쿠터를 몰고 다니는 사내의 분식집이라. 당최 신뢰가 안 갔다. 그러나 동네에 그런 분식집이 있으면 알게 모르게 계속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어느 이른 퇴근길에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1인분을 시켜놓고 “내장 많이 주세요”라며 악착을 부렸다. 그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칼질은 좀 하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째 칼질이 멈추지 않았다. 어, 어 하는 사이에 순대가 소복이 쌓여갔다. 2인분은 되는 양이었다. 마침내 그 남자가 해맑게 외쳤다. “고맙습니다.” 반전이었다. 맛은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양을 생각하면 납득할 상황이었다. 그 뒤로 나는 그 분식집 단골이 됐다.
영국 사람들도 순대를 먹는다. 이름도 오묘한 블랙 푸딩(black pudding). 다만 푸딩이란 말에 지레 짐작하면 안 된다. 피 순대랑 똑같이 생겼다.
“이번 주에 블랙 푸딩 만들어야 돼.”
“아니, 벌써? 아이씨.”
업장에서 블랙 푸딩을 만드노라면 셰프들은 온통 피 칠갑이 되곤 한다. 번거롭다는 얘기다. 외과의가 큰 수술이라도 하듯 고무장갑을 끼고 피를 보게 된다. 재료는 돼지피, 오트밀, 양파, 계피 같은 향신료, 경우에 따라 크림을 더해서 잘 섞는다. 그리고 준비한 돼지 창자에 깔때기를 대고 재료를 꽉꽉 채워 넣은 후 끓는 물에 데치면 영국식 순대, 블랙 푸딩이 된다. 말은 쉬운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만만치 않다. 피를 묻혀가며 순대 아닌 순대를 만들다 보면 ‘역시 이런 건 사 먹는 게 최고’란 생각이 절로 든다.
블랙 푸딩의 다른 이름은 블러드 소시지다. 말 그대로 피로 만든 소시지다. 따지고 보면 순대 자체가 소시지다. 요즘엔 당면 순대가 대부분이지만 옛날에는 피를 넣은 피순대가 주류였다. 서양의 블러드 소시지와 다를 게 없다.
블랙 푸딩은 순대랑 비슷한 생김새지만 먹는 방법은 다르다. 쪄내기보다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는 소시지처럼 잘라 팬에 굽는다. 먹는 때도 다르다. 블랙 푸딩은 영국식 아침 식사의 당당한 주연이다. 아침에 순대라니 벌써 “으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성급한 판단은 금물. 블랙 푸딩은 피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달큰하고 고소하다. 입에 짝짝 달라붙는 감칠맛도 난다. 요걸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베이컨, 바삭한 토스트, 버터, 잼, 이런 것들과 함께 입에 욱여넣으면 ‘세상아, 다 덤벼라!’라고 외치고 싶어질 만큼 힘이 솟는다.
순대든 소시지든 동서양이 속 빈 동물 창자를 보고 먹을거리를 궁리했다는 건 신기하면서도 신산하다. 인류가 어디서나 똑같은 궁핍의 시기를 보냈다는 증거니까. 필요한 것은 노동력뿐이다. 허리를 두드려 가며 돼지 창자에 속을 밀어 넣으면 그게 순대고 소시지였다. 고상하거나 우아하지는 않아도 못난 친구처럼 만만하고 편하니 미워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순대 못 먹어요. 징그러워요”라고 새침 떠는 이보다 ‘태초에 순댓국과 소주는 한몸이었다’며 횡설수설하는 자들이 더 좋다. 무엇보다 1인분 값에 2인분을 썰어 주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외국서 한국에 돌아오면 나는 제일 먼저 집 앞 분식집 순대를 찾았다. 야구 모자를 쓴 그 총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순대를 썰고 있었다.
“저, 순대 1인분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장도 드릴까요? 아! 오랜만에 오셨네요.”
참 오랜만입니다. 그리웠어요. 투박해서 더 정겨운, 당신 같은 그 순대가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필자(32)는 영국 고든 램지 요리학교 ‘탕테 마리’에서 유학하고 호주 멜버른 크라운 호텔 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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