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왕조 시대에는 왕의 이름을 피하는 기휘(忌諱)의 풍습이 있었다. 임금님 같은 높은 분의 이름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기휘는 사라졌지만 기휘를 낳은 심리는 남아 있다. 대통령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처음 나왔을 때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여전히 현직 대통령을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북한에서 김정은은 최고 존엄이라 불린다. 존엄은 라틴어로 아우구스투스다. 고대 로마에서 최초의 황제가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얻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교부철학자다. 프랑스에는 존엄한 필리프(필리프 오귀스트)로 불린 위대한 왕이 있었다. 북한은 존엄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최고라는 수식어를 덧붙였다. 최고 존엄은 우리 식으로 지존(至尊)인데 그런 말은 기독교적 신 아니면 무협지 속의 비현실적 영웅에게나 붙이는 말이다.
▷북한 최고 존엄의 암살을 다룬 미국 코미디 영화 ‘인터뷰’의 극장 개봉이 무산됐다. ‘평화의 수호자(GOP)’라는 정체불명 집단이 얼마 전 “2001년 9월 11일을 기억하라”고 위협하자 영화관들이 상영을 포기했고 결국 영화제작사 소니픽처스가 개봉 계획을 철회했다. 지난달 GOP의 소니 해킹 당시 해킹에 쓰인 악성 소프트웨어에서 한글 코드가 발견돼 북한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고 존엄 앞에서 입을 가리고 웃는 황병서, 양손을 공손히 포갠 최룡해가 보였을 반응이 짐작이 간다.
▷이름과 이미지는 오늘날도 묘한 주술적 힘을 갖고 있다. 어느 나라든 자국 지도자가 암살되는 영화에 거부감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제작된 이상 테러 위협에 굴복해 상영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유럽에서 무함마드 캐리커처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독일은 덴마크 만평가 쿠르트 베스테르고르에게 언론상을 수여해 유럽에서 자유의 지표로 삼았다. 미국 작가 티머시 스탠리는 “완전히 쓰레기 같은 평가를 받은 영화가 미국의 표현의 자유를 중대한 시험대에 올려놨다”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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