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시위에서 터져나온 “먹고살기 힘들어 숨 막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19일 03시 00분


[미 중산층 현장보고서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18>


흑인에 대한 경찰의 무자비한 공권력을 규탄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시내에서 경찰이 시위 참가자를 연행하고 있다. 동아일보DB
흑인에 대한 경찰의 무자비한 공권력을 규탄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시내에서 경찰이 시위 참가자를 연행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보스턴대 사회학 박사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보스턴대 사회학 박사
비무장 흑인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백인 경찰에 대한 잇단 불기소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갈수록 확산될 조짐이다. 지난 주말(13일)만 해도 수도인 워싱턴을 비롯해 동부 뉴욕 보스턴, 서부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대규모 항의 집회가 열렸다.

이번 시위는 시기적으로 매우 이례적이다. 미국은 지난달 추수감사절부터 올해 크리스마스까지 홀리데이 기간이라 우리로 치면 ‘파장’ 분위기다. 대부분 일손을 놓고 한 해를 마감하며 조용히 보내는데 시민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니 예삿일이 아니다.

게다가 서부 지방은 오랜 가뭄 끝에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와 물난리 등으로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해 캘리포니아 여러 지역이 어수선한데도 시위는 확산되고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할 때 많은 시민들이 정말 뿔이 났으며, 이번 사태를 위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미 전역 시위 사태의 단초를 제공한 미주리 주 퍼거슨 시 시위는 4개월간 연일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관심을 별로 받지 못했다. 주류 언론들이 크게 다루지 않은 게 큰 이유이기도 했지만 보통 흑인 시위에는 약탈 절도 등의 범죄가 동반돼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뉴욕 시의 한 흑인이 체포 과정에서 목이 졸려 죽는 장면의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뉴욕 사건은 미진했던 퍼거슨 시위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번 시위 전면에 등장하는 의제는 ‘공권력의 무자비한 과잉대응(police brutality)’과 흑인 검거에만 초점을 맞추는 이른바 ‘인종 프로파일링(race profiling)’이다. 경찰의 무자비한 공권력 집행을 보며 “어쩌면 다음에는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

지금 미국 언론들은 이참에 치안 및 사법체계에 대대적인 손질을 해야 한다는 지적을 쏟아내고 있다. 공권력의 무자비한 집행이 서슴없이 일어나는 뿌리부터 도려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먼저 월스트리트저널은 연방정부의 철저한 조사를 전제한 뒤 후속 조치가 따를 수 있도록 경찰에 의한 총격 사망 사건이 일어날 경우 연방수사국(FBI)에 보고하는 걸 의무화할 것을 주문했다. FBI의 철저한 감시감독을 통해 지방 경찰들의 고삐 풀린 공권력을 미연에 방지해 보자는 취지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아무리 시민들의 총기 소유가 자유롭다 하더라도 시민들을 상대로 군대 수준의 중화기가 동원되는 것부터 우선 막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 국방부가 경찰에게 중화기를 제공하는 것부터 당장 중단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이는 이미 4개월 전 퍼거슨 시에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장갑차와 중화기를 동원해 무지막지한 진압에 나서면서 불거져 나왔던 비판들과 맥을 같이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찰의 군대화는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다.

여기에 사법 시스템 개혁을 주문하는 여론도 높다. 현 사법체계가 많이 배우고 돈이 많은 미국 사회 주류인 백인들이 악용할 소지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배심원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검찰과 경찰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짜맞추기 식으로 대배심 결정을 호도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번 퍼거슨 및 뉴욕 사건에서 검찰이 백인 경관의 불기소 방침을 정해 놓고 대배심 제도를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했다는 논란이 계속 제기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미국 시민들은 지금 공정한 정의 실현을 위해 특정인의 의도대로 사법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막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미국 사법 시스템을 정의의 끝판왕(종결자)인 양 간주하고 우리 모델로 삼자는 우리나라 일부 법조인들이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한편 이번 시위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또 다른 대목은 민생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외침들이다. USA투데이는 시위 현장에서 ‘빈곤 퇴치, 공교육체계 재정비, 정부의 친기업보호주의(corporate welfare) 종식’ 요구가 자연스럽게 함께 터져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참에 미국 사회 전반을 개혁해 보자는 목소리들이다.

우선 시위대의 목소리 밑바닥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분노가 담겨있다. 지난해 미국을 달궜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당시 체포자들의 법률 조언을 맡았던 변호사 와일리 스테클로는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시위 현장에는 하나의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찰 규탄도 있고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도 있다.…미국인들은 각자 나름의 이유들을 갖고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시위 현장에서는 뉴욕 경찰에 의해 목이 졸려 죽어가던 피해자가 수차례 내뱉은 단말마적 비명인 “숨 막혀(I can‘t breathe)!”가 구호로 외쳐지고 있다.

미 공교육 부실화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어 보고 싶다. 다만 요점만 이야기한다면 미 공교육은 현재 부실해질 대로 부실해져 있으며 이 피해자는 결국 비싼 등록금을 댈 수 없어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없는 저소득층과 중산층이다.

한마디로 미 전역에 깊은 상처를 안기고 있는 경제 불황의 암울한 그림자가 공권력에 의한 시민의 죽음을 계기로 거리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다 같은 처지라는 연대의식을 토대로 말이다.

이런 연대가 일시적 사건으로 끝나버릴지, 일부 지식인들의 말대로 새로운 미국을 만드는 초석이 될지, 아니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이끄는 파국으로 치달을 단초가 될지 미국과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보스턴대 사회학 박사
#아메리칸 드림#미국#시위#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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