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여 전 노무현 대통령은 쌀 소득보전 직불금 부당 수령 의혹과 관련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박홍수 장관을 질타했다. 당시 노 대통령이 비속어를 썼다 해서 화제가 됐다.
‘개기다.’ 윗사람의 명령이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버티거나 대들 때 쓰는 속된 표현이다. 그런데 이 낱말, 쓰긴 많이 쓰는데 표제어에 오르진 못했다. 우리 사전은 뜬금없는 ‘개개다’를 표준어로 삼았다. ‘너, 나한테 개길래?’ ‘나한테 자꾸 개기지 마라’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입말을 애써 무시한 것이다. 개개다의 뜻풀이는 ‘누구에게 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다’로 되어 있어 ‘개기다’와 뜻이 다른데도 말이다.
국립국어원이 이달 15일 ‘개기다’를 표준어로 삼았다. 경직된 언어 규범의 상징이었던 ‘짜장면’ 등 39개 낱말을 복수표준어로 삼은 지 3년 만이다. 이번에 표준어로 지정한 13개 역시 표준어와 입말이 충돌해온 낱말들이다. 이 중 개기다(기존 표준어 개개다) 꼬시다(꾀다) 놀잇감(장난감) 속앓이(속병) 허접하다(허접스럽다) 딴지(딴죽) 사그라들다(사그라지다) 섬�(섬뜩) 등 8개는 복수표준어가 아닌 별도표준어가 됐다. 기존의 표준어와 형태가 유사하긴 하지만, 복수표준어로 삼기엔 뜻이나 어감이 다름을 인정한 것이다.
이번 사례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 우리말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 뜻의 분화를 인정하고 저마다의 쓰임새를 용인하는 게 옳음을 보여준다. ‘속앓이’는 본란에서 ‘속병’과 쓰임새와 말맛이 전혀 다르므로 둘 다 표제어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람들이 즐겨 쓰는 생명력 있는 낱말을 표준어로 삼는 데 주저해선 안 된다. ‘마실’을 강원 경상 충청지역에서 쓰는 ‘마을의 방언’으로, ‘놀래키다’를 ‘놀래다’의 충청지역 방언으로 묶어두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달달하다’, ‘꿀꿀하다’ 등은 의미를 추가해야 할 낱말이 됐다. ‘그러나’의 뜻으로 많이 쓰는 ‘허나’나 ‘하나’ 역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2009년)에는 올라 있지만 국어원 웹사전에는 없다.
사전을 뒤적이다 보면 ‘이런 말도 있었나’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죽은 말’들이 많다. 말이 죽는다는 것은 새로운 말이 생겨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어 현실을 반영해 복수표준어를 폭넓게 허용하는 게 옳다. 그래야 우리말이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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