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국제시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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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눈보라 몰아치는 광활한 부두, 수만 명의 군중이 거대한 군함을 향해 달려가는 첫 장면부터 내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호머의 대서사를 능가하는 장관이요, 스펙터클이었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피란민들 사이에 끼어 불타는 트로이 성을 탈출한 아이네이아스처럼 먼 훗날 한국의 신화는 금순이 혹은 막순이로 불리는 한 소녀와 오빠의 헤어짐을 애틋하게 그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의 징표는 수가 놓인 저고리 소매였다고 말할 것이다.

1950년 12월 12일에서 24일 사이의 어느 날.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흥남 부두. 열 살 남짓한 소년은 다섯 살짜리 여동생 손목을 잡고 사람들 틈새에서 엄마 아빠 뒤를 따라 달려간다. 힘들게 갑판에 오른 소년이 동생을 잡아끌어 올리는 순간 저고리의 소매만 남고 소녀는 바다로 떨어진다. 딸을 찾기 위해 다시 배에서 내리면서 아버지는 소년에게 “너는 장남이니까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아버지의 말을 평생 가슴에 간직한 이 소년 가장은 구두닦이도 하고, 부산 국제시장에서 장사도 하고, 파독 광부, 월남 기술자도 되어 동생들을 다 키우고, 자신의 가정도 행복하게 일군다. 지금은 고집불통의 할아버지가 되어 자식들에게 살짝 따돌림받는 쓸쓸한 노인이 되어 있다. 헤어진 여동생은 1980년대 초 이산가족 찾기에서 만났다. 미국에 입양되어 영어밖에 할 줄 모르는데, 헤어지던 순간 오빠가 하던 말, “여기는 운동장이 아니야. 우린 놀러 가는 게 아니야”라는 말을 한국말로 하여 좌석을 눈물바다로 만든다. 그리고 결정적 알아봄의 징표인, 소매가 찢긴 작은 저고리 한 개를 들어 올릴 때 관객들은 울음을 삼키느라 목이 멘다.

‘흥남철수작전.’ 미군 제10군단과 대한민국 국군 제1군단이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피해 선박 편으로 물자와 병력을 남으로 철수시킨 군사 작전이다. 이때 10만 명의 피란민도 함께 내려왔다. 한국인 군의관 현봉학이 에드워드 포니 대령과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아먼드 소장을 설득하여 군수물자를 버리고 사람을 태운 결과였다.

영하 20도의 날씨에 배 안에는 마실 물도, 화장실도, 전기도, 의사도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 군인과 피란민 사이에 말이 통할 리도 없었다. 그러나 레너드 라 뤼 선장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희생자는 단 1명도 없었고, 오히려 배 안에서 아이가 다섯이 태어나 승선인원이 5명 더 늘어났다. 이 기적 같은 일을 2004년 기네스북은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세계 기록’으로 인정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120개국 중 119위. 당시 1등 선원이었던 뉴욕 주 변호사 로버트 러니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함께 고통을 감수하는 한국인들의 놀라운 용기에 한없이 감동했다고 회고했다. 미국인들의 유연한 실용주의적 정신과 청교도적 휴머니즘 그리고 한국인들의 성실한 삶의 자세가 만들어낸 신화적 사건이었다.

러시아 1차 혁명을 그린 예이젠시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보고 괴벨스가 이렇게 말했다던가?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볼셰비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대척점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누구나 대한민국을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영화#국제시장#흥남철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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