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초겨울, 연변은 몹시 추웠다. 피골이 상접한 탈북자들이 밤마다 두만강을 넘어 몰려왔다. 거리와 마을은 동냥하는 탈북자로 넘쳐났다.
그때 머리 흰 50대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연길에선 가장 넓은 축에 속하는 120m²짜리 아파트를 3채나 사서 탈북 고아들을 데려가 돌봤다. 1999년까지 3년 동안 그곳을 거친 탈북 고아는 200명이 넘었다.
그의 이름은 박준재. 미국 시민권자로 제프리 박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한중수교가 막 이뤄졌던 1992년 즈음 중국에 처음 왔다. 초기엔 흑룡강 성에서 사비를 들여 50여 개의 교회를 만들어 농민들을 전도했다. 미국에서 모텔 사업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가 무엇에 끌려 중국 전도에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박 씨는 연변에 탈북자들이 몰려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곧바로 연길로 자리를 옮긴 박 씨는 흑룡강 성에서 전도했던 조선족들의 도움을 받아 탈북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꽃제비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이 박 씨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엔 연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도 없었다.
탈북 고아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국 공안에 두 번씩이나 체포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에 가서 잠깐 돈을 벌고는 그 돈을 들고 다시 태평양을 넘어 지구 반대편 중국으로 날아오기를 50여 차례나 반복했다.
그럼에도 2004년경부턴 더이상 탈북자를 돌볼 수 없었다. 당시 탈북자의 공관 진입이 잇따르자 중국 당국은 대대적으로 탈북자를 검거했다. 박 씨는 도와주던 조선족에게 계속 탈북자를 돌본다는 조건으로 연길의 집 세 채를 넘겨주었다.
2004년 11월 23일 그는 마지막까지 돌보던 10대 부흥이를 포함한 6명의 탈북자를 데리고 연길에서 한국행 길에 올랐다. 하지만 유일한 길이던 베트남 루트는 그 즈음 한국 정부가 베트남에 머무르던 탈북자 468명을 한꺼번에 데려오면서 막혀버렸다. 박 씨는 미얀마 쪽으로 새 루트를 개척하기로 결심했고 12월 초 중국 국경을 넘어 미얀마에 도착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미얀마 주재 한국 대사관에 두 차례나 연락했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정글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한 이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미얀마를 거쳐 라오스로 가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박 씨는 어느덧 63세의 노인이 됐지만 항상 일행의 맨 앞에서 열대림을 헤쳤다. 정글에서 헤맨 지 7일 만에야 드디어 라오스가 건너다보이는 메콩 강에 도착했다. 밀항선을 구해 보았지만 1인당 1만 위안을 불렀다. 돈이 없었다. 고민하던 박 씨는 마을 시장에 가 튜브를 사려 했다. 시장을 다 돌아봐야 4개밖에 살 수 없었다.
강을 넘기 전 일행은 시장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박 씨가 기도했다.
“하나님, 천국에 가게 해 주세요. 아내에게 미안하고…. 제 아들이 계속 선교활동을 하게 해 주세요.” 무엇을 예감했을까. 그는 이것이 ‘최후의 만찬’이라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일행은 가장 연장자인 박 씨에게 튜브를 양보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래 보여도 미군 출신이다”라고 주장하며 기어코 여성과 아이들에게 튜브를 넘겨주었다. 그러곤 자신은 배낭만 메고 메콩 강에 뛰어들었다.
유유하게 흐르는 듯했던 메콩 강은 막상 사람이 뛰어들자 사납게 변했다. 일행은 40분 가까이 정신없이 떠내려가다 강 가운데서 보트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구조됐다. 일행 중 막내였던 부흥이는 이렇게 회상했다.
“물살이 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느 정도 정신이 든 뒤 돌아보니 할아버지는 안 보이고 배낭만 물에서 들락날락하는 것이 보였어요.”
부흥이는 나중에 알았다. 박 씨는 헤엄을 잘 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가에서 몇 시간째 할아버지를 부르며 목 놓아 울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행은 라오스 경찰에 체포됐고 한국 대사관에 통보가 됐다. 하지만 라오스 대사관도 이들을 무시했다. 이들은 목숨 걸고 넘어왔던 메콩 강을 다시 넘어 미얀마 경찰에 넘겨졌다.
미얀마는 이들을 북송하려 했다. 하지만 박 씨의 넋이 이들을 끝까지 지킨 것일까. 미국 시민권자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가 미얀마 한국 대사관에 박 씨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다. 그제야 한국 외교관이 나타났다.
미얀마 경찰이 말했다. “여기 들어온 북한 사람은 다 북에 보냈지만 너희는 한국 외교관이 왔으니 한국에 가게 될 것이야.” 정글을 헤맨 지 석 달 뒤 그들은 한국에 왔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2005년 1월 2일 메콩 강에서 탈북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박준재, 제프리 박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잊어서는 안 될 그 이름을 다시 부르며 소박한 이 글을 그가 머물고 있을 천국에 바친다.
“박준재 할아버지. 당신이 나침반을 들고 처음으로 헤쳤고, 어디엔가 넋이 머무르며 지금도 지켜주는 그 루트를 따라 2만 명의 탈북자가 한국에 왔습니다. 메콩 강에서 당신의 배낭을 건져 올리고 엉엉 울던 막내 부흥이는 얼마 전 컬럼비아대에 입학해 탈북자 최초의 아이비리그생이 됐답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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