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 추리 소설 ‘도둑맞은 편지’의 줄거리다. 유럽 어느 나라의 냉혹한 정치가인 D 장관이 왕비의 과거 연애사가 담긴 편지를 훔친 후 협박을 가한다. 왕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편지를 되찾으려 하지만 번번이 허탕만 친다. 사건을 의뢰받은 명탐정 뒤팽은 비밀 금고만 찾으려던 자신의 전임자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결국 편지가 누구나 볼 수 있는 장관의 편지꽂이에 허술하게 꽂혀 있음을 밝혀낸다.
1999년 미국 인지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가 독특한 실험을 했다. 학생 6명을 두 팀으로 나눠 흰 옷과 검은 옷을 입힌 뒤 농구공을 주고받으라고 했고 이를 동영상에 담았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준 뒤 흰 옷을 입은 사람들끼리 공을 주고받은 횟수를 세라고 주문했다. 어렵지 않은 문제였고 대다수가 답을 맞혔다.
이때 두 교수는 참가자들에게 고릴라를 봤느냐고 질문했다. 절반이 못 봤다고 답했다. 그러나 동영상에는 고릴라 탈을 쓴 학생이 가슴을 두드리며 킹콩 흉내를 내는 모습이 생생히 담겼다. 인간의 인지 능력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다.
사람들이 바로 눈앞의 편지와 고릴라를 못 본 이유는 뭘까. 심리학에서는 그 이유를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특정 사물을 지켜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곳에 한눈을 팔아 시야에 있는 대상을 알아채지 못하는 현상이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뜻이다.
차브리스와 사이먼스 교수는 인간이 주의력, 기억력, 자신감, 지식, 원인, 잠재력 등 6개 분야에서 종종 착각을 일으킨다고 진단한다. 주의력 착각 때문에 바로 앞을 지나가는 차를 보고도 교통사고를 내고, 기억력 착각으로 무고한 사람을 강간범으로 몰아세우며, 지적 착각으로 회사를 파산으로 몰아넣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완전한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
세월호 참사, 잇단 병영 사고, 땅콩 회항, 정윤회 문건…. 올해 우리 사회를 뒤흔든 사건에도 ‘무주의 맹시’가 있었다. ‘6835t의 거대한 배는 침몰하지 않을 것이다’ ‘군대 내 폭력은 일부에 불과하다’ ‘재벌 3세는 회사 직원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룰 수 있는 존재다’ ‘현 정부의 국정운영 난맥상을 보여준 문건이 근거 없는 찌라시에 불과하다’는 착각이 엄청난 사태로 번졌다.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무력하고 고통스럽다.
우리는 세상을 속속들이 보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 관심 있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은 인지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가슴을 힘껏 두들기는 고릴라를 보지 말고, 흰 옷을 입은 사람들끼리 공을 주고받는 횟수만 보라고 꾀는 사람도 도처에 넘쳐난다. 이 때문에 농구공 패스 횟수 대신 고릴라를 지켜볼 수 있는 안목, 이 사람이 고릴라를 보라는 사람인지 농구공을 보라는 사람인지를 가려낼 지혜를 갖춰야 한다. 내년에는 우리 모두 착각의 이면에 자리 잡은 교만, 아집, 이기심을 버리고 더 많은 고릴라를 발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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