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길지만 1년은 짧다는 말이 있다. 2014년 갑오년을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을미년 새해다. 사람마다 새해에는 이런저런 결심을 한다. 그런데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흐지부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흐리멍덩하게 일이 끝날 때 쓰는 표현이다. ‘말짱 도루묵’이나 용두사미(龍頭蛇尾)와 닮았다. 북한에서는 흐지부지를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걸고 들거나 말썽을 부리는 모양’으로 쓴다고 한다. 시비를 건다는 뜻과 비슷하니, 우리가 쓰는 의미와는 다르다.
이 낱말, 어디에서 왔을까. 홍윤표 선생은 ‘휘지비지(諱之秘之)’를 어원으로 본다. ‘자꾸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꺼려져 드러나지 않도록 감춘다’는 뜻이다. 이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흐지부지’로 변하면서 뜻까지 바뀌었다는 것이다. 조선어학회의 ‘큰사전’(1957년)에 ‘히지부지’와 ‘시지부지’가 있던 걸 보면 그럴듯한 설명이다(‘살아있는 우리말의 역사’).
정신이 맑지 못하고 흐릿할 때 쓰는 ‘흐리멍덩하다’와 ‘흐리멍텅하다’ 역시 남북의 표준어가 다르다. 많은 이들이 둘 다 즐겨 쓰는데도 남한에서는 흐리멍덩하다를 표준어로, 북한에서는 흐리멍텅하다를 문화어로 삼고 있다.
보람 없이 쓰는 힘을 ‘헛심’이라고 하는데, 이를 ‘헛힘’으로 쓰는 이들이 많다. 우리말의 ‘힘’은 어떤 말과 결합해서 뒤에 올 때는 ‘ㅎ’이 ‘ㅅ’으로 변한다. ‘팔의 힘’이 ‘팔심’, ‘배의 힘’이 ‘뱃심’, 밥의 힘이 ‘밥심’인 이유다. 요즘처럼 말의 권위가 사라지고, 약속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있는 것은 헛똑똑이들이 헛심만 쓰고 있는 탓이다.
그래서일까. 올해를 경제개혁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정부의 약속이나,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개혁을 하겠다는 대통령의 다짐조차 미덥잖아 하는 사람이 많다. 지키지 못할 약속일랑 애당초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러고 보니 ‘애당초’나 ‘애초’ 대신 ‘애시당초’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애’는 ‘맨 처음’을 나타내는 접두사로 명사와 결합한다. 우리말에는 ‘시당초’라는 명사가 없어 ‘애시당초’는 틀린 말이다. 애시당초의 ‘시’는 ‘때’를 의미하며 ‘당초’를 강조하기 위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을미년에는 애당초 부당한 일에는 헛심 쓰지 말고, 꼭 이뤄야 할 일에 집중해서 흐지부지되는 일이 없도록 하심이 어떨지.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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