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하겠다’는 문자로 질타 받은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가 지난해 말 사회적 협동조합이 만든 커피숍 운영을 놓고 ‘갑질’을 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습니다.”
“부천 한 백화점에서 발생한 모녀 고객의 ‘갑질’ 소동 당시 무릎을 꿇은 주차요원 아르바이트생은 1명이 아닌 4명으로 확인됐습니다.”
“갑오년과 함께 갑들이 가고 을과 미생들이 완생을 이루는 을미년이 왔다”는 누군가의 덕담은 수정돼야 할까. 을미년 벽두부터 이른바 ‘슈퍼 갑질’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1월 7일에도 소셜커머스 업체 위메프가 지역 영업직 수습사원 11명에게 정직원이 하는 일을 2주일간 시킨 뒤 전원 해고해 새로운 형태의 갑질이 보고됐다. 남양유업 대리점 사태가 보여주듯 유통업계의 갑질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정도다.
2014년 12월 7일부터 올해 1월 7일까지 한 달간 트위터와 블로그에 올라온 ‘갑질’ 키워드만 무려 6만929건에 이른다. 갑질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됐다는 얘기다. 이른바 갑을관계, 갑질이 포함된 트위터 문서들도 각양각색이다. 물론 지난해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이 이 가운데 으뜸이다.
2000회 이상 리트윗된 @buck****의 “외국 쪽 미생(드라마) 댓글 중에 ‘야 한국인들 진짜 저러냐? 드라마라서 과장한 거 아냐? CSI 보면 맨날 마이애미에서 살인나는 줄 알겠네’ 하던 질문 리플들이 땅콩 회항 사건 이후로 싹 사라졌음(….)”이라는 글은 땅콩 회항 사건이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음을 방증했다. “땅콩 회항 사태의 주인공(조현아)이 오늘 소환돼서 울기도 했다는 말을 들은 친구가 울기도 했으면 ‘크라잉넛’이군 이라고 말해 크게 웃었다”며 록그룹 크라잉넛을 절묘하게 패러디한 글도 큰 인기를 끌었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의 전체 연관어 1위는 8만4479건의 압도적 언급량을 보인 조현아였다. 2위는 3만8028건을 기록한 사무장이 올랐는데 사무장은 실명보다 직책으로 많이 언급됐으며 가해자와 피해자, 즉 갑을관계가 나란히 1, 2위에 오른 점이 이채롭다.
3위는 2만8778건의 승무원이 차지해 재벌 3세 임원과 승무원의 관계를 드러냈고 4위는 2만4802건을 기록한 검찰이 올라 검찰 수사에 큰 관심이 집중돼 있음을 반영했다. 5위에는 조현아의 쪽지 사과와 관련해 논란이 증폭되면서 사과가 올랐고 6위부터 조현민, 재벌, 국토부, 승객, 구속 등이 뒤를 이었다.
땅콩 회항 사건의 인물 연관어를 보면 당연히 조현아, 조현민이 1, 2위를 차지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3위, 조양호 회장이 4위, 청와대 문건 유출 파문의 주인공인 정윤회가 5위를 기록했다. 이는 정윤회 문건 유출 파문을 잠재우기 위해 조현아 땅콩 회항 사건을 의도적으로 키운 것 아니냐는 항간의 의혹이 표현된 인물 연관어 분포라고 해석할 수 있다.
긍부정 연관어 분포를 보면 부정어 분포가 67.0%로 15.7%에 그친 긍정어 분포를 압도했다. 긍부정 연관어 1위는 1만1369건의 폭행이 차지했고 2위에는 8228건의 증거인멸이 올랐다. 검찰이 제시한 구속 사유 가운데 하나가 조현아 측이 지속적으로 증거인멸을 시도했다는 것 때문이다. 3위는 안전이 차지해 재벌 3세 임원의 슈퍼 갑질이 승객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봤다. 이 밖에도 혐의, 울다, 분노 등이 높은 순위에 올랐다.
실제 ‘갑질’을 언급한 문서의 전체 연관어 분포에서도 대한항공과 조현아, 땅콩이 압도적으로 1, 2, 3위를 차지해 ‘슈퍼 갑질’의 전형으로 조현아 사건을 꼽고 있음이 나타났다. 그 뒤는 백화점, 모녀, 무릎, 주차장, VIP 등이 올랐는데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백화점 고객인 모녀가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관리요원 4명에게 무릎을 꿇리고 폭언을 했다는 내용이 보도되면서 또 다른 유형의 갑질로 주목을 받은 것이다. 갑질과 함께 언급된 심리 연관어를 보면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1위부터 횡포, 폭행, 무릎 꿇다, 뺨때리다, 무시하다 등이 올라 있기 때문이다.
을미년이 을들의 수난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는 이미 을들의 공분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킨 드라마 ‘미생’이 예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인공 장그래와 같은 800만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불안 위에서 상대적 우위를 누리고 있는 또 다른 을인 정규직들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조현아 사건처럼 재벌 3세에 의해 저질러진 슈퍼 갑질은 오히려 심각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국민 모두가 공분하며 그 특권적 횡포를 비판하면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다.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과 사뭇 비교되는 검찰의 발 빠른 수사와 구속기소는 이런 국민적 정서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사실 더 심각한 것은 같은 을들의 갑질이며, 을로 산 부모들이 내 자식만큼은 갑을 만들려는 무한경쟁 사회일지도 모른다. 갑을관계는 불가피할지 모르지만 저성장시대이면서 동시에 무한경쟁 사회의 갑을관계는 또 하나의 심각한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적 질서가 도처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현아’ 때문에 ‘조아현’이란 이름을 가진 분의 별명이 조콩땅이 되었다는 소식”이라는 한 이용자의 재치 넘치는 트윗을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조현아의 땅콩 회항 같은 사회문제에는 간편하게 분노하면서도 쌍용차 같은 사회문제는 냉소하거나 방관한다”는 글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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