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삐라를 보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다. 남서풍을 타고 풍선을 날리면 곧바로 건너편 북한으로 넘어간다. 한반도 지형이 S자 형태여서 바람만 잘 타면 평양을 비롯해 북한 전역으로 삐라가 날아간다. 서해 5도는 군사적으로 북한의 옆구리를 겨냥하는 비수이자 대북(對北) 심리전을 펼 수 있는 천혜의 전략적 자산이다.
하지만 삐라 날리기를 주도하는 탈북자 단체들에 서해 5도는 존재하지 않는 땅이다. 2011년부터 섬으로 가는 여객선에 가스통을 싣지 못하게 돼 발이 묶였다. 일부 현지 주민과 좌파 시민단체의 항의에 여객선 회사들이 굴복했다. 대북풍선단장 이민복 씨는 백령도에 농지를 구입해 풍선기지로 사용하려 했으나 현지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탈북자 단체들은 할 수 없이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에서 힘들게 삐라 날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지형적으로 불리해 어쩌다 좋은 바람을 타더라도 북한 깊숙이 날려 보내기가 어렵다. 역풍에 밀려 남한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풍선 삐라의 효과에 대한 신뢰마저 떨어지고 있다.
삐라 날리기를 이토록 어렵게 만든 주인공은 북한이다. 북한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조준 사격’ ‘불바다’ 협박으로 남한의 ‘삐라 반대론’을 부추겼다. 북한의 협박이 없었으면 주민들이 북한 동포에게 진실을 전하려는 탈북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에 제동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이 연초부터 삐라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설 땅을 잃어가는 남한의 심리전을 확실하게 끝장내려는 전략이다.
삐라는 구시대의 유물이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온갖 소식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정보화 시대에 삐라가 유일하게 한반도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북한이 폐쇄사회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외부 세계에 문을 열고 주민을 거짓말로 세뇌하지 않으면 삐라는 곧바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로 변한다.
북한이 삐라 문제를 거론하면 할수록 독재정권의 치부만 부각된다. 국가 차원에서 한국과 미국을 상대로 사이버 테러를 하는 북한이 몇몇 탈북자 단체의 행동을 구실 삼아 남한에 테러 협박을 하는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국회에서 대화 분위기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삐라 문제에서 후퇴하는 조짐이 보여 유감이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그제 정부에 전단 살포가 남북 관계 개선을 훼손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우리가 물러서면 나쁜 전례가 만들어진다. 2월 말부터 연례 한미 연합 군사연습이 시작된다. 3월에는 유엔의 북한인권사무소가 서울 중심가에 문을 열 예정이다. 북한은 훈련 중지와 사무소 폐쇄를 집요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또다시 국론이 분열되고, 북한의 요구에 응하는 수순을 밟을 것인가.
남북 관계는 박근혜 대통령이 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분명히 해야 할 주요 현안이다. 북한은 김정은의 신년사에 대한 답변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남북 대화의 돌파구를 만들어 낼 방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삐라 공세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면 대화를 위한 대화는 가능할지 몰라도 통일의 큰 그림과는 어그러진다. 북한이 외부 세계에 문을 열지 않고 통일이 가능하겠는가. 북한 주민이 어떤 체제에 살고 있는지, 외부 세계와는 어떻게 다른지 자각조차 못하는데 남한 동포와 기꺼이 하나로 뭉치려 하겠는가. 북한 주민에게 자유세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민족적 과제다. 정부가 나서 삐라를 막는 행위는 통일대박과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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