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십년간 떳떳하게 맡아 해 오셨던 일을 송두리째 넘겨주시고 손을 놨기 때문에 서운함을 느꼈던 때문일까요.
샘물은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듯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물림은
언제까지나 식지 않으며 뼈붙이로만, 뼈붙이로만 이어져가는 겁니다.
연밥 농사가 풍년이라니 연꽃도 장관이었겠다. 호수처럼 너른 연못일 테다. 활짝 펼쳐진 푸른 치마 같은 연잎 사이로 ‘쪽배를 요기조기 띄워가며 연밥을 따’는 목가적인 풍경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8월 한여름 땡볕 아래서 울창한 연잎과 줄기를 헤치고 노를 저으며, 쪽배가 묵직해지도록 연밥을 따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노동일 테다. 화자는 어느 결에 ‘채련요(採蓮謠)’를 흥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연밥 따는 저 처자야/연밥줄밥 내 따 줄게/이내 품에 잠자다오/잠자기는 어렵잖소/연밥 따기 늦어지오’, 화자 아버지도 익히 아실 그 가락.
‘아까부터 우리 아버지께서는/정자나무 아래 등의자에 기대인 채 연밥 따는 아들 모습을 쳐다보고만 계셨’단다. 당신의 땅에서 평안하게, 당신이 ‘몇 십년간 떳떳하게 맡아 해 오셨던’ 일을 이어받은 아들을 지켜보는 지복이여. 그런데 화자는 어쩐지 죄송스럽다. 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의 쓸쓸함과 서운함을 알 것 같은 것이다. 아버지를 위로하려 화자는 외치고 싶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예요! 아버지와 나 사이는 ‘언제까지나 식지 않으며 뼈붙이로만, 뼈붙이로만 이어져가는 겁니다!’ 왜 뼈붙이일까? 노동의 뼈? ‘뼈대 있는 집안’의 그 뼈? 아버지와 아들, 남자의 대물림은 아무래도 피보다 뼈인가 보다. 노에 닿는 물의 결, 쪽배의 흔들림, 연잎 사이에 숨어 있는 탐스러운 연밥을 비틀어 따는 감촉,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구수하고도 풋풋하고도 비린 냄새, 그 하나하나를 아버지는 아들의 몸으로 되사실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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