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65>소릿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3일 03시 00분


소릿길 -박진형(1954~)

몸이 마음을 버릴 때
베란다에 내어놓은 두메양귀비 핀다
연노랑 꽃등이 나를 가만 흔들다가
천구백사십년의 리화듕션에게 데려간다

모시나비는 거미줄에 날개 찢긴 채 울고 있다
복각판에서 찍찍 풀려 나오는
저 소리는 우화(羽化)다

소리로 세상을 촘촘히 읽다니
두메양귀비 곁에서 소리와 몸 바꾼
그대 빈 몸 껴안고 울며 지샌 밤이 있다
그런 밤에는 내 마음 한 가닥
팽팽하게 잡아당겨
청둥오리 떼 날아간다

청둥오리 가는 길
몸이 마음을 버리고 등선(登仙)하는
저 소릿길


2007년 백두산에서 찍은 두메양귀비 꽃 사진을 한 블로그에서 봤다. 금세공인 듯 유리세공인 듯 섬세한 꽃잎이 햇빛을 투명하게 머금은 자태가 가슴 아릴 정도로 아름답다. 함경북도 백두산에 분포하며 북한의 천연기념물이기도 하다는 두메양귀비. 높은 산 중턱 이상의 고지(高地)에서 자생한다는 이 귀한 식물을 구해서 꽃을 피우다니 화자의 집요한 탐미적 취향이 엿보인다. 몸은 마음이 담긴 그릇이거늘 ‘몸이 마음을 버릴 때’라니, 머리는 멍하고 감정은 메마르고 매사 무감각할 테다. 시인으로서는 더욱 위기 상황이다. 마음의 물기가 바짝 마른 채 헛것인 양 공허하고 막막한 화자를 ‘베란다에 내어놓은 두메양귀비’가 구원한다. 그 ‘연노랑 꽃등이 나를 가만 흔들다가/천구백사십년의 리화듕션에게 데려간’단다. ‘국악사의 전설적인 여류 명창’이라는 이화중선. 청아한 목소리와 애절한 창법으로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여서 그 목소리만으로 화중선(花中仙·꽃 중의 선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지. 두메양귀비의 빼어난 아름다움이 이 이름을 상기시킨 듯하지만 지금 ‘복각판에서 찍찍 풀려 나오’고 있는, 화자가 아끼고 기리는 소리의 주인이 주체다. ‘모시나비’가 ‘거미줄에 날개 찢긴 채 울고 있’는 듯한 이화중선의 소리. ‘저 소리는 우화(羽化)’, 그이 자신의 생에 날개를 달아주기도 했고 듣는 이의 영혼에도 날개를 달아주는 소리란다. ‘소리와 몸 바꾼/그대 빈 몸 껴안고 울며 지샌 밤’, 제 삶과 바꾼 통렬한 예술혼이 깃들여진 소리가 화자의 ‘마음 한 가닥/팽팽하게 잡아당겨/청둥오리 떼 날아간다’. 무감각하게 가라앉았던 화자의 몸과 마음이 아련한 열정에 차오르며 힘차게 따라서 날아가게 하는 ‘저 소릿길’!

황인숙 시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