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끝> 금호철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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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조 작가의 설치작품 ‘잔잔한 숨결’
전윤조 작가의 설치작품 ‘잔잔한 숨결’
금호철화
조정권(1949∼)

아, 이 금호철화(金號鐵花)
어려운 식물이지요 쇠꽃을 피웁니다
이 선인장의 성깔을 잘 알지 못하면 키우지 말아야 합니다
콘도르가 사막의 하늘을 맴돌다가 급강하해 앉은 모습
골 깊고 진녹색의 단단한 몸체엔 솟구치고 뻗친 가시들
보세요, 화살촉처럼 무장하고 있어요
가시들은 원산지에서 지나가는 말의 편자까지도 뚫고 올라옵니다
조심하세요 손
이놈들은, 뿌리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시가 생명이지요
숨을 가시로 쉽니다 가시가 부러지면 썩기 시작하지요
어찌나 지독한지 뿌리를 몽땅 잘라 삼년을 말려두었다가
모래에 다시 심으면, 서너달이면 제 몸에서 스스로 새 뿌리를 내립니다
흙 나르는 수레바퀴에 구멍을 내는 것도 이놈들입니다
조심하세요, 가시가 살아있으니까


한 순간이었다. 건강한 30대 가장이 연쇄상구균 감염 후 두 팔과 두 다리를 모두 잘라내고 장애인으로 살게 된 것은. 사지(四肢)와 함께 입술과 코도 잃어 어깨 피부를 이식한 뒤 자신이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호머와 닮았다 농담하는 이 남자. 그는 “팔다리를 잃었던 그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한 해”라고 들려준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순간을 가장 찬란한 순간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팔다리 멀쩡할 때보다 지금 느끼는 행복감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생존율 5%란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아빠로 배우자로 인간으로서 삶이 달리 보이더라고 털어놓았다. 세수와 식사 등 자잘한 일상이 엄청난 도전과제가 됐으나 살아있음의 기쁨을 더 절절히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얼마 전 BBC가 보도한 영국인 알렉스 루이스의 기사를 접하면서 조정권 시인의 ‘금호철화’가 퍼뜩 떠올랐다. 가시가 곧 뿌리이자 줄기인 선인장 금호철화. 사막의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처럼 불행과 좌절의 첩첩산중을 넘어서는 인간의 적응력이 놀라웠다. 인생을 바라보는 깊고 원숙한 통찰력은 극한의 고통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서울 김종영미술관이 기획한 전윤조 작가의 ‘머리가 알지 못하는 마음’전에서도 개인적 아픔을 승화한 예술작품을 볼 수 있다. 어릴 적 청력을 잃고 혹독한 언어훈련을 버텨냈던 작가는 비정상과 상처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 소외와 외로움의 감정을 실로 만든 인체조각으로 표현했다. “나의 작업은 마음에 남겨진 상처들을 돌이켜보며 동시에 스스로 그 상처들을 조금씩 치료해 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긴 줄에 매달린 실 인형의 불안정한 자세가 운명의 거센 악력에 휘둘리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닮았다.

땅속 깊은 곳에서 원석을 캐내도 보석으로 바꾸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돌 깨는 망치와 정련 기계의 강도 높은 단련을 거쳐야 비로소 값진 보석이 태어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올해도 예고 없이 두려운 순간이 닥칠 것이다. 그래도 허구한 날 불평하기보다 기꺼이 맵고 쓴 맛을 감수할 것이다. 잡석에서 보석으로 탈바꿈하는 여정 곳곳엔 감당키 힘든 시련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말이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얼음처럼 빛나고/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가장 높은 정신은/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허옇게 얼어터진 결빙을 노래한다’(조정권의 ‘산정묘지 1’)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금호철화#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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