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다시 찾아온 진보의 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4일 03시 00분


박근혜 대통령 인기 추락… 반전의 기회 잡아
고학력자 양산, 대기업 甲질… 통진당 해산도 호재
새정연 전당대회 등 진영 재편하며 쇄신하면 보수는 큰 위기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진보 진영의 정치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은 남은 임기 내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경제가 갑자기 좋아질 경우 지지율이 반전될 여지는 있지만 큰 기대는 접어야 한다. 박 대통령은 신년 회견에서 경제와 관련한 몇 가지 업적을 내세웠다. 지난해 국내 경제성장률(3.3%)이 세계 평균 성장률(2.6%)을 앞섰고 50만 개의 신규 일자리를 12년 만에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 대신 “힘들어 못 살겠다”는 아우성만 커지고 있다. 보수 정권의 부진은 진보 진영에 더 없는 호재다.

국민이 많이 변했다. 고학력자 비중이 크게 늘었다. 20, 30대의 70%가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이다. 반면 이들이 원하는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시한부 일자리인 비정규직 근로자가 600만 명에 이른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곳곳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예견한 미래의 시나리오는 2015년 한국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들어맞는다. 그는 1942년 펴낸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자본주의는 무너지고 사회주의로 대체될 것으로 내다봤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경제적 여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면서 교육 혜택이 확대되고 지식인 계층을 양산하게 된다. 그러나 지식인 계층의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다. 소외된 다수의 고학력자들은 사회 불만 세력으로 바뀌어 자본주의를 뒤흔들게 된다는 것이다. 슘페터의 이론대로 한국 사회가 사회주의로 이행할지는 알 수 없지만 진보 진영의 기반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진보 진영의 희소식은 또 있다. 대기업 가족의 갑(甲)질은 엄밀히 따지면 해당 행위를 저지른 개인의 문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우리 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같은 사람이 여럿 나올수록 진보의 반(反)기업 주장은 힘을 얻게 된다. 한국 진보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종북’ 이미지가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해소될 기미를 보이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다.

언론이나 문화예술계에서 진보 쪽에 ‘기울어진 운동장’은 언제나 든든한 원군이다. ‘인터넷 천국’ 한국의 포털사이트에서 진보의 목소리는 어느 나라보다 증폭되어 전달되고 있다. 좌편향 지적을 받고 있는 영화계가 모처럼 우파 영화 ‘국제시장’을 만들자 박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우파 인사가 우르르 몰려가 정말 고맙다는 표정으로 관람한 것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요즘 진보 진영의 재편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지옥’을 경험했던 새정치민주연합은 8일 전당대회를 열고 새 대표를 뽑는다. 정의당과 노동당의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고 정동영 전 대통령 후보가 포함된 ‘국민모임’은 신당 결성에 나섰다. 전체 진보 진영이 큰 천막 아래 함께 뭉치는 ‘빅 텐트’ 논의도 진행 중이다.

국민이 이들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진보의 위기’가 아닌 ‘진보 진영의 위기’에 기인한다. 진보 인사들이 유권자들에게 굳건한 믿음을 주지 못해 온 탓이다. 국가안보와 경제 문제의 해결 능력은 회의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고질적인 이중성과 패거리주의도 계속 자신들의 발목을 잡아왔다.

도심 숲 파괴 논란을 빚고 있는 서울 북아현동 이화여대 기숙사 공사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진보 진영의 한 축인 환경단체들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지만 같은 사례인 2010년 홍익학원의 성산동 학교 공사에 대해서는 끈질긴 반대 시위에 나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소속된 일부 변호사의 ‘과거사 장사’도 드러났다. 과거사위원회에 소속되어 권위주의 시절 사건의 피해 여부를 조사한 뒤 자신이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맡은 것이다. 인권과 정의는 돈벌이 도구로 추락했다. 자기 자식은 외국어고에 보낸 뒤 다른 학부모에겐 평등 교육을 강요하는 교육감도 있다. ‘싸가지 진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는 정서적 반감을 자아냈고 국민들은 등을 돌렸다. 이런 행태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 태어난다면 얘기는 크게 달라진다.

진보 진영이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한다고 해도 그들이 선전하는 기적 같은 변화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세상의 먹고사는 문제에서 묘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 정서로 보면 한국의 유권자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진보를 지지할 것 같다. 보수의 위기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진보의 봄#진보 진영#주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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