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튼 감상의 기억이지만 합창이 생활의 유일한 위안인 시기가 있었다. 연주회에 임박해 지휘자가 ‘공연 질을 높이기 위한 제안’을 했고, 거기에 반박해 발길을 끊었다. 개인적인 원망은 남았지만 그가 나쁜 지휘자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객석 맨 뒷줄에 앉아 확인한 연주의 질은 어느 때보다 좋았다. 그는 분명 좋은 지휘자였다.
어설픈 취미의 경험뿐이지만 여럿이 함께 음악을 할 때 리더 한 사람에 의해 얼마나 천양지차로 결과가 갈리는지 어렴풋이는 짐작한다. 각양각색 악기를 늘어앉힌 오케스트라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지휘자에게 마에스트로(대가)라는 존칭은 전혀 과하지 않다. 그건 범상한 이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성취가 아니다. 세계무대에서 손꼽히는 명망의 지휘자라면 고액 연봉을 받고 해외출장 때 비행기 1등석을 제공받는 게 이상하지 않다. 중압감을 감수하며 성과를 낸 보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처우의 당위성과 별개로, 명망의 광휘는 그것을 거머쥔 이의 시야를 좁힌다. 연주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을 체감하는 오케스트라 구성원은 행복한 마음으로 지휘자를 숭앙하게 된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시야는 그로 인해 더 좁아진다.
최근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의 처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시향 직원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이 클래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그는 문두에 아일랜드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문장을 인용했다.
“돼지와 씨름하지 마라. 더러워질뿐더러, 돼지가 그걸 좋아한다.”
존경하는 지휘자를 향한 손가락질을 목격하며 뭉쳐놓았던 비분강개가 구절구절 또렷하다. 그러나 전체 내용의 진위를 떠나 글머리 인용문이 자꾸 눈에 밟힌다. 클래식 음악 세계의 특수성을 잘 알지 못하는 이가 정 감독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긴 마음이 조금이라도 그 인용에 스며 있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돼지임을 자처하겠다.
‘대중문화’라고 불리는 영역에 훨씬 더 익숙한 깜냥으로 외람되이 뭉클하게 기억하는 클래식 음악이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짤막한 선율이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수감자들 머리 위로 모차르트의 음악이 쏟아지는 장면.
정 감독이 시향의 역량을 발전시킨 성과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 발전을 확인할 권리는 연주회 객석에 앉은 청중만의 몫일까. 새벽마다 상처투성이 마음 위에 얇은 철갑을 둘러 묶고 또 어떻게든 하루 견뎌 보자 다짐하며 문밖을 나서는 고단한 ‘미생’들, 당장의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하는 사람들 역시 시향의 음악으로 위로받을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다. 종일 허덕이며 달리다 잠깐 걸터앉은 거리 벤치에서 ‘아 이게 우리 시 교향악단의 음악이구나’ 엿들어 실감할 수 있다면, 지독한 세월의 무게를 음악에 홀려 멍하니 잊는 찰나를 얻을 수 있다면, 지휘자의 연봉과 처신에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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