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최고지도자나 주요 정책결정자들이 회고록을 남기는 것은 여러모로 가치 있는 일이다. 역사의 기록이 됨과 동시에 후대를 위한 정보와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원래 회고록은 자기중심적으로 써지기 십상이다. 오류와 거짓말이 난무하기도 한다. 그래도 회고록은 남기는 것이 좋다. 여러 주장을 크로스 체크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거짓이 있는 경우엔 왜 그런 거짓을 기술했는지 배경을 알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정확한 서술 위해 기록물 열람은 당연
우리 사회에서는 회고록을 남기지 않는 안 좋은 선례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다행히 회고록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 인식되면서 꽤 많은 회고록이 나오고 있다. 일례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자기변명으로 가득 찬 책이었지만 그래도 안 나오는 것보단 훨씬 더 나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필 전 총리가 회고록을 안 남긴다고 최근에 공표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지도자들이 자서전을 여러 개 남기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윈스턴 처칠은 그의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6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헨리 키신저는 공직을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은 1979년에 첫 회고록 ‘백악관 시절’을 출간한 이후 여러 권을 더 펴냈다. 이처럼 임기가 끝나자마자 집필에 들어가 회고록이 곧 나오는 경우는 흔하다. 가장 기억이 생생할 때 기록하는 것이 제일 좋기 때문이다. 또한 회고록 내용이 정책적 논쟁이나 사실관계를 놓고 진위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출간을 놓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이런 수준을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먼저 이 전 대통령 측이 대통령기록물을 열람한 사실 자체에 대한 시비가 일고 있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을 설정하는 이유는 보호기간을 보장해서 재임 시 생산한 기록물의 완전한 이관을 담보하는 데 있다. 대신 전임 대통령은 자신에 관한 기록은 현행법상 본인이나 대리인이 열람할 권리가 있다. 임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출간된 회고록은 대개 본인과 측근들의 집단기억에 의존하지만, 기억이 엇갈릴 때 팩트 체크 차원에서 기록을 열람하는 것은 정확한 서술을 위해 오히려 권장할 만한 사항이다. 이 전 대통령 측이 두어 번밖에 열람을 안 했다는 것이 오히려 실망스러울 정도이다.
이명박 회고록도 공개한 사실의 범위나 내용이 부적절하다 느껴지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민감한 내용들을 다 빼다 보면 그야말로 알맹이 없는 회고록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 종류의 회고록은 후세를 위해 별 도움이 안 된다.
○ 민감한 내용 다 빼면 회고록 무의미
이명박 회고록에서 ‘기밀누설’이란 비판을 받고 있는 부분은 중국 원자바오 당시 총리가 이 전 대통령에게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원한다고 한 말, 북한이 남북정상회담 개최 조건으로 쌀과 비료 등 상당량의 경제 지원을 요구했지만 그것을 거절한 사실 등이다. 남북관계에서는 정상회담이라는 이벤트 혹은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불건전한 뒷거래가 없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중요한 에피소드로도 읽혀질 수 있는 부분이다.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안이지만 이 정도 내용은 다른 외국 지도자들의 자서전에 비하면 오히려 도가 약한 편이다. 외국의 경우 회고록에서 훨씬 더 강하고 생생한 증언을 했다 해도 기밀 누설을 했느니 관련 대통령기록물을 공개해야 하느니 하는 논쟁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정략 아닌 정책 차원에서 논쟁해야
회고록은 본질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그러나 이명박 회고록 논쟁은 더 높은 정책적 수준에서 전개돼야 한다. 정략적 목적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이제 갓 시작된 회고록 쓰기 문화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일 수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회고록을 쓰겠는가. 우리나라 지도층은 회고록을 안 쓴다고 맹비난을 하다가 막상 회고록을 쓰면 온갖 이유를 대며 성토를 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더구나 다른 전직 대통령 측이 대통령지정기록물에서 북방한계선(NLL) 관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삭제하거나 대통령기록물을 모조리 자신의 사저(私邸)로 가져간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던 사람들이 요번 일에 대해 도가 넘는 시비를 거는 것은 이중 잣대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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