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평생을 건다. 평생 당신을 사랑하겠다느니, 평생 이 은혜 잊지 않겠다느니, 이렇게 말이다. 평생을 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나도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을 약속했다. 내가 만드는 잡지의 평생구독자를 스스럼없이 모집한 것이다.
그런 평생구독자 중에 잊지 못할 사람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진가 김영갑 씨다. 제주도에서 20년 동안 풍경사진을 찍던 그는 목숨을 바쳐 두모악 갤러리를 만들었다. 목숨을 걸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루게릭병을 앓는 중에도 폐교를 임대 받아 하나하나 자기 손으로 갤러리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의 투병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러 두모악 갤러리를 방문했을 때였다. 몰라보게 비쩍 마른 그를 바라보기가 차마 마음 아픈데 그가 갑자기 평생구독을 신청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1년을 더 살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평생이라니, 내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지만 그는 부득부득 고집을 부렸다. 더이상 사양하면 “당신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못 박는 것 같아서 고맙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가끔 어떤 사람은 “1년 구독을 신청했다가 중간에 잡지를 보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는 내게 선뜻 평생을 선불하겠다고 했다. 난치병을 앓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 다음해에 그의 부음을 들었다. 그리고 차츰 깨달았다. 그가 말한 평생은 그의 평생만이 아니라 나의 평생까지였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나의 평생구독자가 되기를 신청한 그를 내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니 오래오래 살아서 책을 받아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마지막 힘을 다 쏟은 두모악 갤러리에 매달 잡지를 보내고 있다.
요즘은 인간관계조차 너무나 즉각적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오래 사귀고 평생 가슴에 품는 일은 시대착오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빨리 친해졌다가 어느새 헤어지고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 호흡이 짧은 시대다. 평생의 언약 따위는 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욱 그가 생각난다. 죽음에 임박해 있으면서도 태연하게 내게 평생을 청한 사진가 김영갑. 그는 평생 내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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