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삼중 추돌사고 현장을 보았다. 승용차 한 대는 견인차에 매달려 있었고 시내버스는 앞 유리가 깨진 채였다. 나머지 차량 한 대는 버스 꽁무니에 바짝 붙어 찌그러져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마침 동물원의 ‘거리에서’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유리창 너머로 강변북로의 모습이 보였다. 그 위로 빗방울이 도르르 떨어졌다. ‘우산이 없는데….’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나는 움츠러들었다. 난 인쇄소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인쇄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려 충무로 주변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거래하던 인쇄소도 저렴한 축에 속했지만 부족한 제작비에 맞추려면 더 저렴한 곳을 찾아야 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대부분의 인쇄소는 바쁘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작은 사무실이 나온다. 영업사원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이다. 그들이 견적을 봐준다. 어떤 종류의 인쇄인지에서부터 시작해 인쇄물의 규격, 종이 종류, 제본 형태, 인쇄물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후가공까지. 만들고 싶은 대로 조건을 맞추면 그에 맞는 견적이 나온다. 그런 대형 인쇄소에서는 몇 만, 몇 십만 부가 기본이다. “1000부만 찍고 싶은데요.” 기웃거린 인쇄소마다 탐탁지 않아 했다. 게다가 난 싼 가격까지 요구했다. 대부분 견적은 비슷하게 책정됐다. 내 예상보다는 더 비쌌다. 기대가 빗나갈수록 지쳐갔다.
마지막으로 한 곳을 더 들러보기로 했다. 얕은 언덕배기에 있는 인쇄소였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부장으로 계셨다. 견적을 보기 전 해당 인쇄소에서 해온 작업의 결과물을 펼쳐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품질이 아주 좋았다. 인쇄 중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현상인 잉크가 튀는 하자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절단도 깔끔했다. 제본 역시 튼튼했다. 인쇄소 부장님은 그동안 만든 유명 작가들의 작업물을 언급하며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퀄리티를 약속했다. 앞서 다닌 인쇄소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좀 더 전문적이랄까. 작업물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은 보이지 않는 확신이 생겼다. 유쾌한 분위기가 고조에 다다를 즈음 부장님은 계산기를 갖고 왔다. ‘드디어 견적의 시간이구나.’ 견적서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상반되는 두 가지 기분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이다. 원하는 금액대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그렇지 않았을 때를 대비한 체념의 마음.
타자기로 탁탁 입력한 숫자들이 합산돼 종이 한 장에 채워졌다. 합산된 숫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정확히 네 배의 금액이었다. 부장님은 급격히 어두워지는 내 표정을 보았는지 품질만큼은 약속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머릿속으로는 이곳에서 인쇄된 잡지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종일 걸어 다니며 기웃기웃했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내가 치를 수 없는 숫자가 하루의 고단함을 한 번에 터뜨리는 것 같았다. 견적을 기다리는 동안 마시라고 내어준 믹스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성급히 인쇄소에서 나왔다. 견적서를 손에 쥔 채.
집으로 돌아와 자려고 누우니 삼중 추돌 사고 현장이 다시 떠올랐다. 버스 승객들과 운전자들은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의 하루가 궁금했다. 나처럼 고단했을까.
잡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나의 통장은 환승역 같은 곳이 됐다. 입금과 동시에 바쁘게 출금되는 모습이 어찌나 볼만 한지. 어지간해선 쌓이는 일 없는 통장을 보면서 지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툭툭 털어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눈이 생겼기 때문이다. 거기엔 좋은 종이를 알아보고 좋은 인쇄 방식을 숙지하는 노하우까지도 포함된다. 눈물의 견적서를 받은 곳에서처럼 고품질의 인쇄를 해보진 못 했지만 어떤 결과물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그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경험이다.
견적서는 책상 한쪽의 여러 책 사이에 꽂아 두었다. 잊고 있다가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라든지 어떤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 꺼내 보면 좋은 원동력이 된다. 엄두가 안 나는 금액을 볼 때마다 얼굴 근육이 움츠러들지 않도록 표정 관리는 더 연습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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