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유영]“페미니스트가 싫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1일 03시 00분


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우리 집은 딸만 셋이다. 그 덕분인지, 운이 좋았는지, ‘여자라서…’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이 크게 좌초된 적이 아직까지는 별로 없다. 제삿날에 남자 사촌들과 나란히 절했고, 남녀 공학인 학교에서 남학생들과 무난하게 지냈으며, 남자 기자가 여전히 많은 신문사에서 1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해 왔다. 여자의 참정권과 교육권이 ‘사치’로 여겨지던 100여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내 삶의 일부 궤적은 페미니즘에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건 ‘커밍아웃’ 수준의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배우 에마 왓슨도 지난해 유엔본부에서 연설하며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할수록 그것이 남자를 증오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는 걸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여자에게 전투적이고 기가 세다는 시선이 뒤따르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시각이 오해를 넘어서 혐오로 치닫는 듯하다. 지난해 과격 무장 조직 ‘이슬람국가(IS)’ 가입을 위해 터키로 간 것으로 알려진 김모 군은 트위터에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다. 그래서 IS가 좋다’는 글을 남겼다. 최근에는 한 팝 칼럼니스트가 여성 잡지에 ‘IS보다 페미니즘이 위험하다’는 궤변을 펼쳤다. “여성이 남성을 공격해 현재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면 그 자리를 여성이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빌어먹을 페미니즘’의 배경에 대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서천석 씨는 “상당히 많은 남학생이 자신들이 여학생들보다 유리한 점이 거의 없고, 나중에 군대에도 가야 하며, 오히려 불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은 팍팍해진 삶 속에서 일종의 ‘선 긋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불황이 장기화될수록 ‘내 것’,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이들 역시 이런 현실 속에서 손쉽게 공격성을 표출할 대상을 여성에게서 찾았을 개연성이 높다. 인터넷 일베 게시판에서 ‘페미충’(페미니스트와 벌레를 결합한 말),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 등 여성 비하 단어가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페미니즘은 남성 혐오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차이(difference)를 차별(discrimination)로 연결하지 말자’는 정신을 기반으로 한다. 여성 문화 잡지인 ‘IF’는 1997년 창간사에서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인간의 잠재성을 실현할 기회를 더욱 많이 가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무언가 하고 싶을 때 ‘여자라서…’라며 주저하는 사람은 ‘장애인이어서…’, ‘외국인이어서…’, ‘가난해서…’, ‘가방끈이 짧아서…’라는 사람과 충분히 손잡을 수 있다. 그게 당신일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페미니즘의 시선은 사람을 향한다.

김유영 소비자경제부 기자 abc@donga.com
#페미니스트#커밍아웃#IS#차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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