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 여론을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인들이 여론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정치권의 위정자들은 국민이 원하는 바로서의 여론을 바탕으로 정치행위를 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필요성 사이의 간극은 정치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지 및 호불호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합리적 도구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주 국회에서는 국무총리 후보자 인준 문제를 놓고 여야가 대치하다가 16일 본회의 표결을 하기로 극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그런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전 국민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인준 여부를 결정하자는 제의를 해 정치권과 국민을 어리둥절케 했다. 이러한 제의 이면에 잠재돼 있는 정치권의 그릇된 인식을 이참에 제대로 짚어 보았으면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 국민, 당원, 유권자 등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여론조사가 정치권의 핵심적 변수로 급부상한 것은 2000년 전후이다. 당시 여야를 막론하고 총선이나 지방선거뿐 아니라 심지어 대선 후보마저도 여론조사로 결정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저간의 인식은 작금에도 큰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여론조사에 ‘올인(다걸기)’하려 들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작심하고 여론조사를 오남용하려 드는 분위기마저 감지되고 있다. 하지만 여론조사는 자칫 본말이 전도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도 항상 안고 있다. 여론은 어디까지나 여론일 뿐이다. 최종 결정에 다다르기 위한 도구 혹은 지표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넘어서는 순간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위험성을 경계하여야 한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모든 국민이 똑같이 여론을 중시하는 것도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여론의 동향과 궁극적인 발전 지향성 혹은 공론 사이에도 적잖은 괴리가 상존한다.
급작스러운 제안을 불쑥 내놓은 제1야당 대표의 인식의 언저리를 조금 깊이 있게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국가적 차원의 중차대한 사안일수록 여론조사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야당 대표의 인식이 온당한 것이라면 입법, 사법, 행정 등을 위시한 온갖 제도적 기제는 굳이 왜 필요한가. 정치지도자, 선량, 판관, 공복 등을 선정하기 위한 그 많은 관행과 절차는 또한 다 무엇이겠는가? 시급한 현안마다 그때그때 여론조사를 실시해서 그 결과에 그대로 따르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국가의 중대사일수록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해득실을 초월하는 중장기적 안목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권을 보면 본질보다는 모양새를 앞세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야당 대표의 급작스러운 제안 또한 그 이면에는 여론조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다시금 국내 정치권이 여론조사 만능의 맹신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한국 정당정치의 실패를 자인하고 법치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방증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서구 사회에서 지난 200여 년간 여론조사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여론조사 결과의 오남용 가능성을 끊임없이 경계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공정한 여론조사의 실시와 그 결과의 선용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 전제조건이 만족될 경우에 비로소 여론조사는 민의의 보루로 기능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지렛대로 작동할 수 있다. 금번 논란은 여론조사에 대한 무분별한 인식에 경종을 울리고 이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균형 잡힌 시각을 회복하게 하는 반전으로 작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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