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질 들뢰즈는 “화가란 빈 캔버스를 채우기보다 이미 채워진 것을 비워야 한다”고 말했다. 머릿속 고정관념과 관습을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역설은 건축에서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만들고 짓기보다는 자르고 없애는 일이 관건이란 말이다. 그런데 설사 생각은 그렇다 해도 사람이 살던 집을 실제로 쪼개 놓는다면? 공간적 충격이 클 것은 틀림없다.
고든 마타클라크의 ‘쪼개기(Splitting)’(1974년·그림)는 미국 뉴저지 교외의 폐가를 동력톱으로 절단한 작업이다. 절단의 과정이 기록된 영상에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잘린 건물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빛이 신비롭게 보인다. 집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공간체험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작업이 끝난 후 그 건물은 부서지고 잊혀진다. 마타클라크의 ‘건물 자르기’ 작업은 그처럼 없애는 작업이었다. ‘짓기(building)’가 아니라 ‘짓지 않기(un-building)’라는 반(反)건축 운동이다.
‘쪼개기’는 교외의 주택가라는 지역에 사회적 함의를 품고 있다. 도심에서 떨어져 교외에 위치한 집은 사생활을 보장받는 친밀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마타클라크의 충격적 작업은 이렇듯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사이 경계가 확실한 서구의 집에 대한 환상을 깬 것이다. 중산층 미국인들의 꿈인 교외의 안락한 가정이 지닌 안전과 지속에 대한 환상을.
이러한 대도시 교외에 지어진 집의 안정성과 자율성이란 그 배후에 있는 사회·경제적 불안감을 담보로 하는 것. 이상적 거주지인 교외 주택지는 저소득층과 유색인종들이 배제된 공간이었다. 마타클라크는 이렇듯 전형적인 중산층의 집을 절단함으로써 완벽한 집에 대한 허상을 물리적으로 드러낸다. 건물 한가운데 생긴 공백은 골이 깊은 사회문제를, 메울 수 없는 삶의 단절을 그대로 보여준다.
요컨대 마타클라크의 ‘파괴의 미학’은 근시안적인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적 문제를 직시하게 한다. 안락한 사적 공간의 환상으로 사회의 계층과 인종의 문제를 간과하는 개인주의적 삶에 일격을 가하는 듯. 쪼개진 집에서 보는 물리적 절단의 충격은 그토록 실제적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다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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