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외국계 스포츠웨어 업체에서 일하던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 회사는 명절을 앞두고 임직원들에게 자사 제품을 30∼60% 싸게 살 수 있는 할인 쿠폰을 나눠줬다. 임직원들에게 선심을 쓰면서 매출을 늘리고 재고는 털어내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추석 연휴 전에 아내가 가져온 쿠폰들을 봉투에 나눠 넣었다. 그리고 “그간 취재에 도움을 줘 고맙다”며 친한 공무원들에게 ‘촌지’로 돌렸다. 지금은 기획재정부로 이름이 바뀐 재정경제부에 출입하던 때였다. 관료들은 당황해했지만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 중 몇몇은 나중에 차관, 장관, 국회의원이 됐다.
죄책감 없이 했던 과거의 이런 행동이 국회가 최근 통과시킨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는 내년 9월 이후라면 범법 행위가 된다. 중앙부처 공무원과 출입기자는 누가 봐도 업무 관련성이 깊다. 그 쿠폰으로 공무원이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20만 원짜리 옷을 산다면 6만∼12만 원의 혜택을 본다. 적발되면 공무원이나 나나 각각 몇 배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공무원 경력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건 물론이다.
공직자와 배우자로 범위를 좁혀 숫자를 줄였다지만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자는 약 300만 명. 이 법이 한국 사회의 투명성을 높일 것이라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고위 공무원들의 성격상 자신의 경력과 공무원연금으로 보장된 안정적 노후를 걸고 골프를 치거나 비싼 밥을 얻어먹을 가능성은 낮다. 최근 동창회가 보낸 취임 축하 난을 이완구 총리가 곧바로 돌려보낸 걸 보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된다. 법 시행까지 1년 반이 남았지만 관가엔 이미 화환 경계령이 내려졌다.
부패와 관련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국민의 소비 생활에 불가역적 변화를 가져오곤 했다. 지금은 국민주(酒)가 된 소주폭탄이 그런 예다. 외환위기 직후 처음 등장한 ‘소폭’은 200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도입된 접대비실명제가 결정적 계기였다. 기업이 50만 원 이상 접대비를 쓸 때 상세한 명세를 적어 내게 한 이 제도로 비싼 양주폭탄을 마시는 게 부담스러워진 사람들은 소폭을 대체재로 선택했다. 이후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에 접대비실명제가 크게 완화됐지만 국민들의 음주 습관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
위헌 논란을 차치하고 김영란법의 경제적 효과는 단기적으로 분명히 부정적이다. 높은 투명성이 장기적으로 사회의 효율을 높일 수 있지만 당장은 고급 음식점, 호텔, 화훼업체, 골프장, 선물세트 및 상품권 시장, 택배업계 등이 큰 타격을 받을 공산이 크다. 한우 및 과수 농가, 수산업 종사자들에게도 영향이 미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봐도 비슷하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부패 해소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작년 중국의 성장률이 7%대로 떨어진 이유 중 하나가 반부패 운동이란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타이밍으로 보면 최악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한국 경제의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우려를 공식화하면서 경기 진작을 위해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는 분위기다. 가계부채, 노후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꽁꽁 얼어붙은 소비를 이 법은 더욱 냉각시킬 가능성이 높다. 법 통과에 찬성한 경제학자 출신 국회의원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비겁한 줄 알지만 지역주민 표를 의식해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디플레 문턱에 간당간당 서 있는 우리 경제의 등을 내 손으로 확 떠민 게 아닌지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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