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메르켈은 수호천사가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2일 03시 00분


일본의 역사왜곡, 미국에서 통한다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보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主流 된지 오래
메르켈의 對日 쓴소리에 찬사…美 次官 과거사 공동책임론에 발끈
一喜一悲만 하는 것은 허망
역사의 진실도 國力 있어야 지킨다

재미교포 손재옥 씨가 지난해 가을 모국에 와서 이런 말을 남기고 갔다. “우리 2세, 3세들이 역사에 대해 혼란과 고통을 겪는다. 아이들은 미국 선생님이 ‘일본은 한국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가르친다면서 ‘일본이 나쁘다는 한국이 잘못된 거잖아’라고 부모에게 묻는다.”

필자가 어느 국내 대학 미주 동창회보에서 문유미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부교수의 강연발췌문
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을 접한 것도 작년 그때였다. 문 교수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과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는 연구들이 1990년대 이후 특히 북미를 중심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했다. ‘다른 시각’이란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요약되는데, 영미권의 일제 식민지 연구에서 이미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의 경종은 이어졌다. “엄밀한 이론적 비판과 정교한 실증에 기반을 둔 대안적 시각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서구의 동아시아 연구와 학생 교육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다수의 영미권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대학과 대학원 교육을 통해 배출되는 만큼 그 파급효과는 학술연구의 범위를 넘어 정치적 문제가 될 것이다.”

재미교포 손 씨가 토로한, 미국 학교들의 한일관계사 교육에 대한 당혹감은 작은 부분일 뿐이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지난달 27일 카네기국제평화재단 강연도 문 교수가 언급한 ‘정치적 문제’의 한 현상일 수 있다.

셔먼 차관이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 3국을 향해 “과거사는 빨리 정리하고, 북핵 같은 당면 현안에 치중하자”고 한 것은 옳은 권고이다. 그러나 그는 “(과거사 문제의 해결과 화해가 안 되는) 책임은 한중일 모두에게 있다”고 했다. 그는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런 도발은 발전이 아니라 마비를 가져온다”며 한중 지도자를 문제삼았다. 지난 1월 말 방한했을 때 “미국은 고노·무라야마 담화가 견지되기를 바란다”고 했던 셔먼 차관이지만 한 달 뒤인 이번에는 무슨 연유인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과거사 미해결에 대해 피해자 공동책임론을 편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명의로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사과했고,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명의로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 전반에 대해 사죄했다. 그런데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1차 집권 때인 2007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강제성을 뒷받침할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다”고 했고, 2차 집권 중인 작년 1월 ‘위안부에 대한 사실 부정과 위안부 출신 여성에 대한 음해를 시정하라’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권고를 “사실 오인(誤認)에 의한 일방적 권고”라고 일축했다. 또 2013년에는 “침략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주장했다. 셔먼 미 국무차관은 이처럼 ‘역사 수정’을 기도하는 일본 지도자보다, 터무니없는 역사 수정을 문제 삼는 한중 지도자를 겨냥한 셈이다.

반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번 주 도쿄에서 ‘과거사 정당화’에 집착하는 아베 정부를 향해 일침을 가했다. 그는 아베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에서 “과거 정리가 화해의 전제”라고 했고, 일본 야당 지도자를 만나서는 “한일 관계(개선)도 중요한데 그러려면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우리는 셔먼에게 화내고 메르켈에게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런 일희일비(一喜一悲)는 허망하다. 우리가 과거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당한 것은 국력이 약하고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학계에까지 손을 뻗쳐 역사 왜곡을 꾀하고, 이에 미국의 정치적 이해가 맞물리는데 메르켈의 대일(對日) 쓴소리에 위로나 받고 만다면 역사가 우리 편, 진실의 편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총체적 국력, 국가 능력과 국민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역사 왜곡에 또 당하는 이중의 수모를 각오해야 한다.

정치는 지리멸렬이고 경제 엔진은 식고 있는데도 지도자들에게는 국가를 새로 도약시킬 책략이 안 보인다. 교육은 국력을 키울 수 있는 글로벌 경쟁력과 거리가 멀고, 사회에는 애국을 비웃고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활개를 친다. 이런 상태로 한일 과거사의 진실 하나인들 지킬 수 있겠는가.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메르켈#과거사 정당화#아베#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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