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85>산양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3일 03시 00분


산양 ―고이케 마사요(1959∼ )

호타카의 깊은 산속 온천에서
산양과 마주쳤던 다섯 살 가을
산양은 발소리도 없이 다가와
자옥한 수증기 속에서 알몸인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산양을 물끄러미 맞바라보았다

무리에서 벗어난 산양과
외톨박이로 홀로 있던 나

나는 손으로 온천물을 떠서
산양을 향해 뿌렸다
말 대신 건넨 인사였는데
산양은 조금 놀란 듯했다
온천물에 젖은 산양의 가슴털은
산양의 외로움이 젖은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 숲을 쓸고 갔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이윽고 산양은 조용히 몸을 돌리더니
가만가만 뛰어 산을 향해 되돌아갔다
꿈을 꾸듯 온천물에
깊은 밤 살며시 발끝을 담그면
자옥한 수증기 너머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그때 만난 산양이
틀림없이 찾아오리라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아득한 우주의 시선으로
가슴털의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깊은 산속의 노천(露天) 온천에 어린아이가 혼자 몸을 담그고 있다. 아이가 다리를 쭉 뻗고 앉아도 물이 가슴께에 찰랑거릴 정도의 안전한 깊이겠지만, 잠시라도 어른 없이 두다니 화자는 퍽 똘똘하고 차분한 아이였나 보다. 온천 가장자리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등을 기댄 채 아이는 좀은 불안하고 외로운 기분으로 물을 참방거렸을 테다. 그 소리에 이끌려 찾아왔을까. ‘자옥한 수증기 속에서 알몸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산양 한 마리. ‘나도 산양을 물끄러미 맞바라보았’단다. 화자는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좋아하는 아이였나 보다. 산양도 화자만큼 어렸을 테다. 무구한 생명체들의 고즈넉한 조우. 서로 호감을 갖고 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수줍은 존재들의 인사가 세 번째 연에 펼쳐진다. 아이가 작은 동작으로 끼얹은 물을 맞을 정도로 산양이 가까이 있다. 산양은 제 발로 온천에 찾아온 만큼 물을 싫어하지 않겠지만 ‘조금’ 놀랐을 테다. 심술쟁이라면 산양의 얼굴을 겨냥했을 텐데 아이는 목 아래로 물을 뿌렸다. 그래도 가슴털이 젖은 것을 보니 미안하고 안 된 마음이 드는 아이다. ‘바람이 불어 숲을 쓸고’ 가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이윽고 산양은 조용히 몸을 돌리더니/가만가만 뛰어 산을 향해 되돌아갔’단다. ‘자옥한 수증기’ 속에서의 한순간이 ‘꿈을 꾸듯’ 펼쳐지는 동화 같은 정경이다. 동화는 어린이가 사는 세계다. 어른이 없는 이 세계는 외로운 어린이의 가슴에서 더 생생할 테다. 그래서 어른이 된 뒤 외로울 때면 거기 ‘깊은 밤 살며시 발끝을’ 담글 수 있을 테다.

황인숙 시인
#산양#고이케 마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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