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표결할 때 재미있는 광경이 간혹 눈에 띈다. 일부 의원이 본회의장 전면(前面) 양쪽에 설치된 전광판을 연신 쳐다보는 것이다. 그러고는 투표한다. 왜 그럴까. 전광판에는 재석의원이 찬성했을 경우 이름 옆에 녹색 원이 켜진다. 반대했을 때는 빨간 원, 기권했을 때는 노란 원이다. 동료 의원들이 찬성이나 반대 어느 쪽을 많이 했는지 확인한 뒤 이른바 대세를 따르기 위해서다. “웬 봉숭아학당?”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의원들이 표결하는 법안의 내용을 제대로 모르니 벌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먼저 본회의에서 처리하는 법안이 많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인 3일, 2월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올라온 안건은 79건으로 이 가운데 법안은 75건이었다. 이 안건들을 모두 처리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3시간 31분. 단순히 산술적으로 보면 한 건을 처리하는 데 평균 2분 40여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본회의에 상정될 안건은 주로 본회의 전날 결정된다. 때때로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가 늦어지면 본회의 날 오전에 최종 마무리되기도 한다. “처리할 법안은 많고, 들여다볼 시간은 적어서 일일이 내용을 찾아보고 이해할 겨를이 없다”는 해명이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국회가 상임위원회 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데에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급격한 사회변화를 입법이 따라가야 하는 현실 속에서 법안 발의는 늘어만 간다. 19대 국회 종료가 14개월가량 남은 현재 발의된 법률안은 1만3000건을 넘었다. 이미 18대 국회 전체 발의 건수보다 많다. 의원이 아무리 독립된 헌법기관이라 할지라도 그 많은 법안을 완벽히 이해해서 의결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상대적으로 전문성을 지닌 각 상임위에서 심의해 본회의에 올린 법안을 의원들은 “어련히 잘했을까”라고 믿으며 통과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이 현실 탓만 하다 보니 어린이집에 폐쇄회로(CC)TV 설치와 보조-대체 교사 배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이 부결되는 일이 생겼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법안이 어린 자녀를 둔 수백만 부모의 바람을 담았으며, CCTV 설치는 논란거리지만 보조-대체 교사 의무화가 더 절실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 토론에 나선 한 의원의 “CCTV 설치는 아동학대의 해결책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단선적인 주장에 재석의원 과반이 반대나 기권을 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원들이 이 법안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야당의 한 초선의원은 “눈치껏 표결하고 본회의장을 나설 때면 자괴감이 든다”고 털어놨다. 그렇다고 모든 법안을 다 알아야 한다는 주문은 아니다. 적어도 국민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법안이라면 사전에 시간을 쪼개서라도 공부를 하자는 말이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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