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수사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대형비리 수사를 하다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말이다. 특별수사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이번에도 들어맞았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미화 10만 달러를, 허태열 전 비서실장에게 현금 7억 원을 전달했다고 밝혀 파문이 일고 있다.
성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인 9일 아침 한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폭로한 발언은 구체적이다. “김 전 실장이 2006년 9월 VIP(박근혜 대통령)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 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 “2007년(경선 당시 직능본부장이던) 허 전 실장을 강남 리베라호텔에서 만나 7억 원을 서너 차례 나눠서 현금으로 줬다.”
수사는 생물, 어디로 튈지 몰라
성 씨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메모에는 두 전직 비서실장 외에 이완구 총리와 이병기 현 비서실장, 친박(친박근혜) 핵심인 (서병수) 부산시장, 유정복 인천시장, 홍문종 의원과 홍준표 경남지사의 이름까지 적혀 있다. 항간에 나돌던 ‘성완종 리스트’가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야당은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라며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2006년 9월 독일을 방문해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40분간 단독회담을 한 다음 날 경선 참여를 최초로 발표했다. 미화 10만 달러와 7억 원을 건넸다는 시기는 박 대통령이 패배한 2007년 당내 경선과 연결돼 있다. 묘하게도 지난 대선 때의 언급은 없다. 김 전 실장은 “맹세코 그런 일이 없다”고 펄쩍 뛰고 있고, 허 전 실장도 부인한다.
두 사람이 설사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두 사안은 정치자금법 위반의 공소시효 5년(지금은 7년)을 넘긴 데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다. 그러니 수사를 하더라도 진상이 밝혀질 개연성은 낮다. 문제는 의혹이 꼬리를 물어 한동안 현 정권의 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이번에야말로 비리의 덩어리를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 바로 다음 날 경남기업 압수수색이 이어졌다. 성 씨는 “(검찰이) 자원 쪽을 뒤지다 없으면 그만둬야지, 제 마누라와 아들, 오만 것까지 다 뒤져서 가지치기 해봐도 없으니까 또 1조 원 분식 얘기를 했다”고 토로했다.
사기꾼은 자살하지 않는다
같은 날 김진태 검찰총장이 비극을 예감이라도 한 듯 환부만 정확히 도려내 기업과 사람을 살리는 수사를 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러나 부패 척결을 위해 “끝까지 가보자”는 박 대통령의 의지가 강했다. 대통령의 의지는 수사팀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부담을 느끼면 무리를 하게 되고 결국 성 씨의 죽음과 메가톤급 폭로로 이어졌다.
자살은 목적 없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보다 두려운 그 무엇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성 씨가 자살하기 전날 현직 대통령을 압박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공개 기자회견의 의문도 이제 풀린다. 그의 폭로는 진실일 개연성이 높다. “사기꾼은 자살을 안 한다”고 수사전문가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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