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바로 그날 한나라당이 주도해 통과시킨 사면법 개정안이 정부로 넘어왔다.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이 법안을 15일 이내에 공포하거나, 아니면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에 재의(再議)를 요구해야만 했다.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결정하기 1주일 전 특사 명단 등을 국회에 통보해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법안의 핵심이었다. 탄핵안 가결 전 노 대통령은 석가탄신일인 5월 26일을 기해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 등 대북 송금사건 관련자 6명을 특별사면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4·15 총선 전략의 일환으로 호남 민심을 끌어안기 위해서였다. 한나라당은 제동을 걸기 위해 사면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정략과 정략이 부딪친 것이다. 무산된 독립 사면심의기구
당시 고건 권한대행은 법무부와 청와대 민정수석실로부터 상반된 검토 의견을 받았다. 현직 대통령도 거부권을 쓰려면 정치권의 눈치를 보며 고심해야 한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위헌적 요소가 명백하므로 국회에 재의를 요청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반면 박정규 민정수석은 “받아들여도 무방하다”는 쪽이었다.
고 대행은 23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를 의결한 직후 박관용 국회의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박 의장보다는 탄핵 후폭풍으로 천막당사로 옮긴 박 대표의 반응에 신경이 쓰였다. 그는 “박 대표의 말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반대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고 대행은 특별사면 심의기구를 설치하라고 강금실 장관에게 지시했다. 그는 “국회에서 의결한 대로 법률 공포를 하면 특별사면 대상에 누구를 넣고 뺄지 정치권에서 나눠먹기를 할 위험이 컸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대법관 출신 등 권위 있는 인사들로 독립적인 위원회를 꾸려 특별사면권의 오남용을 막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한시적 권한대행이 챙기기엔 벅찬 과제였다. 그는 “제도를 만들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현행 사면법은 사면에서 제외할 범죄나 외부의견 청취에 대한 규정이 없다. 법무부 보조기관에 불과한 사면심사위원회가 2008년 초에 출범했지만 견제 역할을 기대하긴 힘들다. 대통령에게 사실상 무제한 사면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여당 되면 사면법 개정 반대
야당 때 주장하던 것을 여당이 되면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게 우리 정치권의 나쁜 풍토다. 공청회까지 거친 사면법 개정안이 지금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반대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발표한 대국민메시지에서 성완종 특별사면 의혹의 진실을 밝힐 것을 주문하면서 특별사면제도의 개선을 다짐한 바 있다. “대통령이 자꾸 이것(사면권)을 남발하면 제도적으로 방지하는 입법도 해야 한다”는 야당 대표 때의 소신을 이어가고 있다.
야당도 사면법 개정에 적극적인 만큼 국회에서 여야가 법 개정 논의를 재개하면 어쩌면 쉽게 타결될 수 있다. 독립적인 사면 심사기구를 만들고 사면 제한 범죄도 정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박 대통령이 권한을 내려놓는 결단을 통해 이번에야말로 사면권 오남용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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