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국민’이라는 이름의 속임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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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앞세운다. 4·29 재·보궐선거에서 전패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국민이 패배한 게 아니다”라는 멘트를 남겼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공무원연금 개악(改惡)안에 합의한 뒤 “국민 대타협에 의해 합의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문 대표의 발언은 모순투성이다. 새정치연합이 선거에 졌는데도 국민은 패배하지 않았다면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이 틀렸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다. 김 대표의 말도 잘못됐다. 일반 국민 누구도 공무원연금 문제의 ‘대타협’에 가담한 적이 없다. 분노한 민심을 더 자극하는 말이다.

▷과거에 국민은 독재시대의 단어이거나 기피 용어였다. 진보 진영에 특히 그랬다. 그들은 ‘국민’ 대신 ‘시민’을 애용했다. 지금도 양식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시민사회’라고 부르며 국민이나 국가와 구분한다. 노동단체들은 행사 때 ‘국민의례’ 대신 ‘노동의례’를 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일제 잔재라는 이유로 퇴출됐다.

▷하지만 고려시대 기록에도 국민이라는 말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31회에 걸쳐 국민이 등장한다. 세종 때가 33회로 가장 많다. ‘국민 소망에 부합하다’ ‘국민에게 죄를 짓다’ 같은 표현이다. 푸대접받던 국민을 정치 쪽에서 유행시킨 사람은 안철수 새정치연합 의원이다. “국민이 원하면”을 입에 달고 다니던 그는 ‘국민보고회’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선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민펀드’를 조성했다.

▷‘국민’에 대한 일각의 거부 반응은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도 맞물려 있다. 새정치연합의 정강정책을 보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곧바로 1960년 4월 혁명으로 넘어간다. 1948년 건국이 없으니 국민의 정체성이 모호해 진다. 문 대표나 안 의원이 말하는 ‘국민’이 전체 국민인지, 자기 편 국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자꾸 국민을 언급하는 것은 진전이다. 국민들은 정치인이 국민을 들먹이는 게 속임수라는 걸 잘 안다. 정치인들만 유권자들이 넘어갈 줄로 착각하고 있으니 이런 소극(笑劇)이 없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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