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원이 평등한 가족에겐 희생과 배려란 공통점 있어
자녀가 공부 안하고 속썩이든 가장이 직장 잃어 방황하든
그들은 참고 기다릴 줄 알아
소중한 가족을 지키는 힘은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삶에 있어
이경묵 구중회 감독의 다큐멘터리 ‘학교 가는 길’은 히말라야의 오지 마을인 ‘차’와 ‘파룸’에 사는 아이들과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여정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다.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되는 위험한 얼음길 ‘차다(얼음담요)’를 열흘에 걸쳐 걷는 그들의 얼굴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냉엄한 대자연에 대한 겸손이 서려 있다.
영하 30도의 혹한에 동상에 걸린 발로 강을 건너기 위해 때론 30kg이 넘는 짐과 아이들을 어깨에 얹은 채 바지를 벗고 강물에 몸을 적셔야 한다. 얼음 속에 하반신을 담그고 자신들을 업어 나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깊은 희생정신에는 그저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마침 최빈국(最貧國)에서 도약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던 네팔의 지진 참상 소식에 직접 재해를 겪어나가야 하는 이들뿐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가족과 친지 생각에 충격과 근심이 깊을 한국의 네팔 근로자들에게도 마음이 쓰인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그동안 불행한 가족을 참 많이 보았다.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서로에 대한 미움 때문에 지옥을 헤매는 이들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난 속에서도 깊고 아름다운 가족애를 잘 가꾸어 가는 가족도 분명 존재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피할 수 없는 큰 충격과 상실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힘이 되어야 할 가족 때문에 오히려 상처를 받고 있는 와중이라면 외부의 작은 스트레스에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고난을 받더라도 합심해 상황을 잘 이겨내는 가족들에게는 어떤 특징들이 있을까.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해 주며 기다려 주는 참을성이 있다. 어쩌다 아이가 방황을 해서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남편이 직장을 잃어도, 아내가 실수로 큰돈을 잃어버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불행을 서로 감싸 안는다. 어쩌면 상대의 잘못을 포용해 주기 위해서 아주 많이 손해 볼 수도 있지만 내가 희생을 하는 것이 그래도 더 마음 편하고 행복하다는 전제가 깔린다.
이런 마음은 가족 내에서 누군가가 절대 권력을 갖고 있으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생기지 않는다. 구성원 모두가 비교적 공정하게 존중받을 때 자신과 상대방의 잘못과 실수를 관대하게 용서해 주는 분위기가 생긴다. 집안을 공포 분위기로 만드는 가장,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인 할머니나 어머니, 공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집안의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자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정에서는 찾기 힘든 덕목이다.
건강한 가족들은 서로에 대한 기대도 현실적이다. 부모라면, 자식이라면, 형제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틀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인다. 가정이란 공동체는 절대 완벽한 천국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부모가 재벌 같은 재력을 갖고 있는 것이 내 꿈인데 부모가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둥, 자녀가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자랑거리인 완벽한 모범생이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아 좌절이라는 식의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더 잘 사는 것같이 보이는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모자라지만 우리 가족이니까 제일 좋고 이유 없이 사랑한다. 권력과 돈을 제 그릇보다 넘치게 누리는 이들은 예외 없이 불행하다. 비(非)본질적인 껍데기가 스스로를 얼마나 거만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주변의 아첨꾼과 달리 바른 소리를 하는 가족이 밉고 걸리적거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가족에게는 상식에 어긋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자제력이 있다. 예컨대 일확천금을 노린다든가, 손해만 끼치는 술 도박 외도 싸움 등을 벌이지 않는다. 기본적인 일상의 지혜를 갖춘 이들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원형적인 본능이지만, 그것을 잘 보존해 가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구한말이나 6·25전쟁 직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예외 없이 한국의 화목한 가족애에 찬탄을 보냈다. 영화 ‘학교 가는 길’의 희생적인 가족은 어쩌면 문명과 자연의 혜택 속에 어느 틈에 우리가 잃어버리고 만 우리의 과거가 아닌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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