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의 시장과 자유]해외 투기펀드의 놀이터가 된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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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몇 해 전 미국 헤지펀드 스틸파트너스가 일본 조미료업체 불독소스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하자 불독소스는 일본식 포이즌필(poison pill)인 신주(新株) 예약권을 발동해 경영권을 지켰다. 포이즌필은 경영권 위협을 받는 기업이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값에 신주를 사들이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스틸파트너스는 주주평등주의가 침해됐다며 소송을 냈지만 일본 최고재판소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미국 유럽 일본에서는 포이즌필 외에도 대주주가 보유한 주식에는 1주당 복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한다. 기업의 장기 발전이나 일자리는 뒷전인 투기자본의 공격에서 자국 기업을 지키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창만 있고 방패는 없다

모든 주주가 동일한 의결권을 가져야 선진국형 기업 지배구조라고 여기면 착각이다. 현재 ‘글로벌 스탠더드’는 오히려 획일적 주주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무려 29개국이 차등의결권을 허용한다.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과 M&A 활성화를 위해 외국자본에 대한 빗장을 대부분 풀었다. 적대적 M&A의 순기능도 있지만 선진 각국이 투기펀드의 폐해를 절감하고 경영권 방어책을 도입하는 추세에 역행하면서 해외 투기펀드의 놀이터로 전락했다는 점이 문제다. 기업을 공격할 창은 날카로워졌는데 이를 막을 방패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우리 현행법은 세계에서 가장 경직적인 1주 1의결권 원칙을 명문화했다. 선진국들이 허용하는 차등의결권 주식은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 2010년 정부가 포이즌필 도입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해외 투기자본보다 한국 대기업에 더 적대적인 정치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거의 유일하게 남은 방어수단인 자사주(自社株) 처분마저 제약하자는 법안이 얼마 전 발의될 정도다.

미국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삼성그룹 간에 지금 벌어지는 ‘전쟁’은 간단한 사태가 아니다. 해외 투기펀드가 한국 최대 그룹의 계열사 합병이라는 핵심 의사결정에 개입해 이익을 챙기려는 첫 번째 시도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효과에 대한 견해는 다를 수 있지만 만약 이번에 엘리엇에 당한다면 앞으로 국내 대기업들의 사업 구조조정은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헤지펀드의 칼날은 현대자동차 SK LG 한화 포스코 KT 등 다른 대기업에도 향할 것이다. 기업들이 한정된 재원을 경영권 방어를 위한 지분 늘리기에 돌리면 투자와 고용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엘리엇의 ‘삼성 공격’ 파장


엘리엇은 주주가치 제고를 내세우지만 삼성물산 지분 매집 과정을 들여다보면 설득력이 약하다. 삼성의 계열사 합병이나 지배구조를 문제 삼는 투자 철학을 지닌 펀드였다면 애당초 주식을 사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엘리엇은 2003년 SK를 공격한 소버린처럼 한국의 허술한 경영권 방어제도의 허점을 악용해 기업을 흔든 뒤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기고 ‘먹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의 일부 부정적 행태가 때로 마뜩잖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한국경제나 국민에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될 해외 투기펀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긍정적 역할이 크다. 우리 기업들이 줄줄이 헤지펀드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선진국 수준의 경영권 방어 장치를 마련할 때다. 이는 대기업 봐주기나 특혜가 아니라 한국경제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해외 투기펀드#놀이터#포이즌필#차등의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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