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그렉시트의 지정학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5일 03시 00분


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뜻하는 ‘그렉시트(Grexit)’ 위기는 일시적으로 모면했다. 채권단의 긴축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는 백기 투항을 한 결과다. 그렉시트 논란은 각국 증시와 경제에 미치는 충격파가 큰 사안이었지만 안보 측면에서도 살펴볼 대목이 있다. 돈 문제 말고도 주목할 측면이 많다는 얘기다.

그리스 문제는 냉전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미국과 옛 소련의 이념적 대립을 실제 상황으로 바꾼 계기가 바로 1946년 공산주의 게릴라의 무장봉기로 시작한 그리스 내전이었다. 공산 게릴라가 세를 확대하자 옛 소련의 개입을 우려한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47년 3월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무장한 소수나 외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국민을 지원하겠다”며 공산주의 확산을 막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리스와 터키에 4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5만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낸 내전은 우익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그리스는 냉전 기간에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공산권 국가로 가득한 발칸 반도에서 홀로 비공산권 국가로 남았다. 그리스에 진출한 미군 기지들은 옛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만약 옛 소련이 발칸 반도 대부분의 국가를 영향권에 넣는 대가로 그리스를 서방 측에 넘기지 않았다면 냉전의 지도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렉시트 논의가 지속되는 와중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에게 지지 의사를 밝히고 그리스를 통과하는 천연가스관 설치 등 러브콜을 보냈다. 유럽의 정책결정자들이나 미국 정부가 움찔했던 것도 이런 역사적 맥락 때문이다. 그렉시트는 그리스가 러시아에 노출될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 제재를 강화하는 전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국의 지원을 받아 경제 제재를 버티는 러시아가 그리스를 대대적으로 지원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런 솔깃한 제안은 지정학적 판도를 바꾸는 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리서 벌어지는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당장에는 아닐 수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친다. 국제 정세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고 외교 활동을 벌이는 것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시작된 미국과 옛 소련의 갈등도 처음엔 먼 나라의 일이었다. 그냥 미국과 옛 소련이 사이가 나쁜가 보다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에선 미국과 옛 소련이 대결했고, 한반도에선 6·25전쟁이 발발했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했고, 그럴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수많은 희생자와 이산가족이 생겼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지만 여전히 한국 외교의 갈 길은 멀다. 한 전직 외교관은 “한국 외교는 아직도 힘이 센 나라에만 줄 대기를 하려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일본과 화해하라고 강요하고 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로 한국을 압박하는 등 변칙적인 현상이 한국 외교에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13년 만에 타결된 이란 핵협상도 한국 외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북핵 문제를 두고 외교부는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 탓만 한다. 지금은 한국 외교가 다양하고 급격한 정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 변화를 어떻게 활용해 새로운 판을 이끌어갈지 심혈을 기울여야 할 때다. ‘전방위적 외교 노력의 값진 성과’를 자랑할 여유가 있는지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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