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에서 물러나기 얼마 전 남성일 서강대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남 교수는 유 의원이 밀어붙이는 사회적경제 기본법의 위험성을 지적한 뒤 “굳이 법을 만들겠다면 법안 이름을 사회주의경제 기본법으로 바꾸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만난 최종찬 전 건설교통부 장관도 이 법의 독소를 걱정했다.
유 의원의 원내대표 퇴진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여기에서 하지 않겠다. 다만 그가 건재해 반(反)시장적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면 아찔할 뻔했다. 이 법은 우리 헌법의 핵심 경제 질서인 자유와 창의를 훼손하고 정부 조직의 비대화와 나랏돈 낭비를 불러올 ‘경제 폭탄’ 성격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유복한 집안 출신의 경제학 박사인 유 의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까지 자유주의 성향이 뚜렷했다. 그랬던 그가 50대에 접어든 뒤 변신했다. 복거일 작가는 “시장을 떠받들던 유 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신념을 버린 것 같다”고 질타했다.
1999년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새 길을 천명한 역사적인 ‘슈뢰더-블레어 선언’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경제와 복지 정책에서 과도한 ‘사회적 요인’을 없애고 ‘경제적 요인’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16년 전 유럽의 중도좌파 정당들도 이렇게 달라졌는데 한국의 집권당 원내 사령탑은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유 의원은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를 말했다.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빈곤층 노인 등의 약자를 돕는 정책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국고를 낭비하면서 정부나 정치권과 유착할 좀비 집단을 양산할 정책은 따뜻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기업 규제를 풀고 투자를 활성화해 일자리와 소득을 늘리는 것이 ‘따뜻한 보수’라는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의 반박이 훨씬 설득력을 지닌다.
새누리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 원장으로 지난달 선임된 김종석 홍익대 교수는 유 의원의 대학 2년 선배다. 1980년대 후반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김 원장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경제신문 등의 칼럼을 통해 자유와 창의, 규제혁파와 노동개혁을 강조한 경제학자다.
김 원장은 그제 필자와의 통화에서 자칫 당내 노선싸움으로 비칠 것을 걱정하면서도 “먹고사는 문제에는 공짜가 없으며 경제주체들이 일은 덜 하면서 더 많이 챙기려고 하면 미래가 없다”고 강조했다. 다수에게 돈을 거둬 어려운 소수를 지원해야지, 소수에게 거둬 다수에게 나눠주는 복지정책은 안 된다고도 했다. 웰빙 기회주의 체질의 새누리당이 헌법 가치와 원칙을 지키는 정당, 악성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는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데 그가 어떤 역할을 할지 지켜볼 것이다.
한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김종석 경제관과 궤를 같이하는 정책으로 다른 나라들보다 선방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후반과 박근혜 정부 초기 유승민류(流)의 경제관이 정치권과 사회 곳곳에 득세하면서 장기 경기침체를 초래한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기업규제 완화, 공공부문 축소, 노동개혁을 추진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영국 보수당은 올해 5월 총선에서 부자 증세와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공약한 노동당에 예상을 깨고 압승했다. 두 달 전 영국인들이 세계를 놀라게 한 교훈을 한국인들도 되새길 만하다. 국민이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다면 세계의 흐름에 역행하는 정치권의 잘못된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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