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는 19세기 왕조군대와 21세기 민주군대가 20세기 힘의 논리로 대치 중
한반도는 DMZ가 확장된 곳…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은
대북 억지력 확보 위한 고육책
확실한 대북 지렛대 얻어내고 성과를 우방국에 잘 설명해야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을 것
북한의 지뢰 도발은 기자를 35년 전 이등병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북한의 목함지뢰로 중상을 입은 우리 병사 2명이 속한 부대가 당시 기자가 근무했던 바로 그 부대여서다. 자대 배치 후 고참들에게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는 것이었다. 큰비가 내리면 북측 지뢰가 떠내려 오기 때문이다. 기자의 최전방 근무는 그리 길지 않았으나 사단사령부의 작전서기병으로서 비무장지대(DMZ)에서 일어나는 특이사항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당시 사단은 1978년 10월 제3땅굴을 발견해 사기가 높았다. 땅굴을 발견해 주가를 높인 사단장이 불과 2년 후에 대통령이 되는 전두환 소장이었다. 서울에서 44km 남짓 떨어진 곳에서 시간당 3만 명의 병사와 대량의 중화기를 옮길 수 있는 땅굴을 발견한 것은 사단의 큰 명예였다. 그러나 DMZ에서는 자랑스러운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남과 북의 최전방 감시초소(GP)에 근무하는 사병들이 북측 GP에서 만나 회식을 한 일이다. 비록 끝물이긴 했으나 어느 쪽이 잘사는지를 놓고 체제 선전을 하던 시절이었다. 북측 GP가 언제 만나자는 제안을 했고, 우리 쪽도 그러자고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날이 왔다. 주저하다 북측 GP로 가보니 그들은 좋은 음식과 술, 담배 등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빈손으로 간 우리 초병들은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그 후의 사건처리 과정은 생략하겠으나 당시 사단 내에서는 북한군에게 망신당한 것을 더 문제 삼는 분위기도 있었다.
수색중대장이 월북한 사건도 있었다. 사건 자체보다 중대장 운전병과 개성방송이 더 기억에 남는다. 운전병은 함께 월북하자는 중대장의 위협을 거부했다. 그러자 중대장은 운전병에게 소총을 발사했고, 다행히 철모를 맞고 빗나갔다. 운전병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비상을 걸었다. 중대장을 잡지는 못했으나 운전병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장기간의 포상 휴가를 받았다. 월북한 중대장은 바로 다음 날 개성TV에 나와 전날까지 자신이 지휘했던 부대원들에게 월북을 권유했다. 당시 내무반에서는 희미하게 개성TV의 화면이 잡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DMZ라는 곳이 어떤 충돌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특수한 지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삶과 죽음, 적과 조국, 충성과 배신, 자유와 독재라는 극과 극의 가치와 더불어 살다 보면 전우가 당했을 때 전역을 연기해서라도 끝장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북한의 지뢰 도발 이후 우리 군이 재개한 확성기 방송을 두고 “그게 무슨 혹독한 제재냐”는 비판이 많았다. DMZ의 특성을 잘 몰라서다. 기자는 공·사석에서 “지켜보자”고 했다. 예전 사단의 병력을 표시하는 지도에는 반드시 확성기의 위치도 표시할 만큼 중요한 무기라는걸 알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이미 본 대로다.
어느 학자의 분석 틀을 원용하자면 DMZ는 19세기 왕조군대와 21세기 민주군대가 20세기 힘의 논리로 대치하는 특수한 지역이다. DMZ의 특성을 확장하면 곧바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이 된다. 더욱이 북한은 강력한 적이자 통일의 대상이기도 한 묘한 위치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에 대한 찬반은 제쳐두고, 기자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억지력이 꼭 필요하다는 분석에는 동의한다.
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가장 반대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전승절의 내용이 ‘항일’이기도 하지만 DMZ처럼 복잡한 한국의 대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7, 28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포럼에서도 일본 측 참가자들은 “시진핑 주석의 옆에 선 박 대통령의 사진은 일본에 매우 부정적으로 비칠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 뿌리 내린 한국의 중국 경사론에서 나온 불편한 시각이다. 한국 측의 한 인사는 “북한에서 포탄이 날아오면 누가 막아줄 것이냐”고 반박했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남북관계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우리 측의 주장은 일본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만,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는 이상 중국으로부터 북한의 일탈을 억지할 수 있는 유효한 지렛대를 약속받고, 그 성과를 미국과 일본 등 주변국에 성실히 설명해 오해를 줄일 필요성은 분명히 느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서야 되겠는가. 이해가 첨예한 일은 끝났다고 생각할 때 늘 새로운 숙제를 잉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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